신의 섭리에서 인간 이성의 발현으로
서양 중세에는 신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적 관점에 역사가 매몰되어 인간역사 자체가 신의 의지에 종속됐습니다. 그러다가 14세기 이후 르네상스 운동이 전개되면서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어요. 신 중심에서 다시 인간이 그 중심에 서게 된 것이지요. 16세기 이후부터는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돼 기독교적 세계관에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17세기 이후에는 자연과학의 발달이 촉진되면서 실증적인 역사탐구 경향이 등장하기도 했어요.
그러던 중 18세기에 이르러 드디어 이른바 ‘계몽주의’라는 새로운 역사학이 출현합니다. 계몽주의 역사학은 이성과 자유를 존중하고 개인주의를 옹호한 것이 특징이에요. 계몽주의 역사학은 신을 대신하여 인간 이성의 보편성을 믿는 입장을 견지했어요. 그러면서 이성에 대한 강한 긍정으로 이성이 발달한 현재를 중요시하고 이성이 발달하지 못한 과거를 단절하여 무시하려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즉, 중세를 암흑기로 판단하고 이를 제거하고 싶어 했지요.
이처럼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는 계몽주의가 발달하면서 역사를 철학적으로 이해하려는 풍조가 일어났습니다. 대표적 인물이 바로 19세기의 헤겔이었어요. 이 같은 역사철학은 실증자료에 의거하여 경험적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험적 인식, 즉 형이상학적 도식과 법칙에 의하여 이해하려는 것이었어요. 특히 헤겔은 “역사란, 인간 정신(이성)의 체현과정이며 특히 인간 정신이 ‘자유’를 자각해가는 과정을 밝히는 것”이라고 했어요.
역사‘학’, 두발로 서다
이처럼 다른 학문과 얽혀있던 역사가 독립된 학문으로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 바로 19세기 독일의 역사학자, 랑케에 의해서입니다. 그는 앞서 설명한 관점 중 하나인 ‘사실로서의 역사’를 주장한 인물이기도 해요. 이 글에서 근대 이후를 중요하게 설명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랑케는 앞선 헤겔과 같은 역사철학자들이 주관적·현재적 역사해석 태도를 지니고 있다면서 비판했습니다. 다시 말해 역사철학자들이 역사를 형이상학으로 몰고 가면서 선험적 이론이나 법칙을 먼저 세워놓고 이로부터 역사를 연역적으로 해석해간다는 점을 지적했어요. 역사는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그대로 밝히는 것이 중요하지, 정신적이고 관념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즉 역사를 철학에서 분리해낸 것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랑케의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학이 과거를 재판하고 장래에 유익하도록 인류를 선도한다는 따위의 기능을 기대하여 왔다. 이 글은 그런 허황한 기능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원래 어떻게 있었는가를 보이려 할 뿐이다....... 아무리 제약이 많고 아름답지 못한 사실이라도 그것을 정확히 제시하는 일이 최상의 원리임은 의심할 바가 없는 것이다.”
- 랑케(Leopold von Ranke) - 『라틴 게르만 민족사』.
물질이 역사를 결정한다
한편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는 고도의 자본주의경제와 산업화라는 거대 흐름이 관통하면서 노동문제와 같은 여러 사회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등 세계는 거대한 전환에 노출됩니다. 19세기 후반 칼 마르크스는 역사발전의 원동력은 정신이나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 조건에 의해 좌우된다고 생각했어요. 생산수단의 소유여부에 따라 계급이 나뉘는데, 이 계급간의 투쟁에 의해 역사가 진보한다는 것입니다. 즉, 물질적 생활의 생산양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과정을 제약하며 곧, 헌법과 법률, 종교와 예술, 철학과 학문이라는 상부구조가 경제구조와 같은 하부구조에 의해 제약을 받으며 결정된다고 본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역사학은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제 역사학은 단순히 학문이 아니라 사회변화를 이끄는 강력한 정치이데올로기가 된 것이지요. 그리고 기존에 상부구조에만 집중돼있던 시선을 확장시키는 효과도 불러왔습니다.
인간 정신의 힘이 역사를 움직인다
한편 이탈리아의 크로체는 역사에서 인간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고 하면서 역사가의 주관적 해석을 강조했습니다. 크로체는 연대기와 역사를 시체와 생명체로 구분했어요. 역사는 어디까지나 역사가의 현재적 관심 속에 자각되어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지요.
그 유명한 에드워드 카도 비슷한 입장에서 크로체에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에 우리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 라는 명제를 알고 있게 된 것이지요. 에드워드 카는 “역사는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과의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의 계속적인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했어요. 결국 역사는 현재의 순간에서 이해되는 것이라며 역사의 현재성을 극명하게 부각합니다. 또 역사는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의미를 갖는다고 하면서 현재 사료에 대한 역사가의 올바른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장기지속의 구조가 인간 역사를 결정한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프랑스에서는 아날학파라고 부르는 그룹이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어요. 그 흐름은 ‘구조사’입니다. 인간 역사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되, 시간이 지나도 변화하지 않는 역사의 심층에 도사린 ‘장기지속’의 특징을 발견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아날학파에게 정치사는 변화무쌍하고 장기지속성이 없는 것이므로 의미가 없었어요. 정치 중심의 사료로 남아있는 것만을 역사연구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본 것이지요. 반면 지리적 환경이나 생물학적인 현실 또는 정신적 제약에 의해 오랜 세월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구조’이고 이것이 ‘장기지속’성을 갖는다고 했습니다. 결국 인간의 역사는 그 장기지속성을 갖는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 것입니다.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회의
이성과 합리성에 기반하고, 실증성을 추구했던 근대 역사학의 흐름은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큰 인식전환을 겪었습니다. 그토록 긍정하던 이성의 끝이 나찌와 인종학살을 자행한 세계전쟁으로 치달았던 것에 대한 치열한 반성이었지요. ‘거대담론거부, 반이성중심주의(다원주의), 해체(탈중심화)’를 기치로 한 ‘탈근대’ 담론이 대두된 겁니다.
역사학에서는 근대 이래로 긍정해 왔던 ‘역사는 진보한다’라는 발전사관에 대한 근본적 회의, 단선발전론에 대한 반성이 이어졌습니다. 특히 정치사 위주의 서사구조에서 탈피, 기록에서 소외된 일반 민중들의 이야기에 주목한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하층민은 자신을 대변할 수 있는 사료를 남기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역사가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이처럼 ‘근대’적 특성을 벗고 새로운 접근을 통해 역사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흐름이 일상사 혹은 미시사의 영역입니다.
<사료로 확인하기>
젊은 알렉산더가 인도를 정복했다. 혼자서 해냈을까?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벌했다. 그래도 취사병 한명쯤은 데리고 있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펠리페 왕은 자신의 함대가 침몰하자 울었다. 그 이외에는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사람 이외에 승리한 사람은 또 누구지?
역사의 페이지마다 승리가 나온다. 그럼 승리의 축제는 누가 차렸을까? 10년마다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 거기에 드는 돈은 누가 냈을까? 참 많은 이야기들, 그만큼 많은 의문들
– 브레히트, 「책 읽는 어느 노동자의 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