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려(고구려)의 별종(別種)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대조영은 유민들을 이끌고 영주로 옮겨와 살았다.(『구당서』 북적열전 발해말갈)
발해군(郡)이란 옛날의 고려(고구려)국이다. 천지전황 7년(668) 겨울 10월에 당의 장군 이적이 고려를 정벌하여 멸망시켰다.(『속일본기』 성무기 4년)
발해사신 고제덕 등이 발해왕의 교서와 방물을 보냈다. 그 교서에 다음과 같이 발하였다. “나(대무예, 발해 2대왕)는 외람되이 대국(大國)을 맡아 여러 번(蕃)을 총괄하며 고려(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속일본기』 성무기 5년)
고구려 유민이었던 대조영은 고구려 멸망 후 당의 유민 강제 이동정책에 의해 영주지역으로 끌려갑니다. 이 영주지역은 당이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해 운영한 전략적 도시로서, 고구려 유민 뿐 아니라 거란, 말갈인들이 섞여 지냈던 곳이지요. 이곳은 ‘당의 국제 포로 수용소’로 언급될 정도로 당이 약해지면 언제든 반란이 일어날 수 있는 위험한 곳이었어요.
결국 696년 거란인 이진충이 영주지방 관료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고, 대조영은 이 혼란을 틈타 영주를 빠져나옵니다. 이후 요동에 남아있던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여 난리를 피해 동쪽으로 이동합니다. 당은 곧 이진충의 난을 진압하고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던 대조영 집단을 추격하기 시작했어요.
이에 전쟁을 결정한 대조영은 당의 군대와 천문령에서 맞붙게 됐어요. 이 전투에서 당군을 격파한 대조영은 만주 동부지방에 남아있던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세력까지 빠른 속도로 규합하여 현재 중국 길림성의 동모산을 근거지로 새 나라를 세웠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한지 30년 뒤에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가 세워진 거예요(698). 이로써 남쪽에는 신라, 북쪽에는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 시대가 형성됩니다.
8세기 초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은 당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면서 흑수말갈을 제외한 나머지 말갈 세력들을 모두 통치 영역 내에 복속시키며 영토를 확장합니다. 이를 부담스레 여긴 당이 흑수말갈을 이용하여 발해를 견제하려 하자 무왕은 당을 선제공격합니다. 약 2차례에 걸친 당과의 전쟁으로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이 기회를 이용해 발해는 내부의 친당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게 되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왕을 중심으로 한 권한을 강화하면서 왕조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자 했지요.
이후 3대 문왕(文王)은 무왕과 달리 당과 친선관계를 유지했어요. 당에 유학생도 파견하고 사절도 보내면서 선진 문물을 수입해 내치를 다지고자 했습니다. 정복활동이 대강 마무리 되었으니 내실을 다지는 순서로 간 것이지요. 문왕은 이때 당의 정치제도를 모방하여 중앙정부를 꾸렸습니다. 그러면서도 발해의 사정에 알맞게 변용해서 사용했어요. 솔빈부와 같은 행정기관을 두어 지방통치에도 관심을 쏟는 등, 중앙으로의 권력집중에 힘쓰기도 했습니다.
문왕이 죽자 약 25년간 왕이 6번이나 바뀌는 등 지배층 내부에서 권력투쟁이 이어집니다. 혼란이 수습하는 과정에서 9세기 초 선왕이 즉위합니다. 즉위 직후 선왕은 골칫거리였던 흑수말갈까지 통제함으로써 대부분의 말갈을 복속시켰습니다. 남쪽으로는 신라의 영토도 공격하여 결국 양국은 국경을 맞대게 되었습니다. 발해는 넓어진 영토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전국을 5경 15부 62로 편제하였습니다. 그리고 각 지방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행정을 장악했지요. 발해는 당으로부터, ‘바다 동쪽에 가장 융성한 국가(해동성국)’란 칭호를 받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약 9세기경 발해의 서쪽에서 거란이 각 부족을 통일하고 주변국들을 정벌하기 시작했어요. 국세를 키운 거란은 발해로 칼날을 겨누었고, 일주일 만에 발해의 수도가 함락됩니다. 926년, 거란에 의해 발해는 약 230년 만에 멸망하게 됩니다. 발해의 유민들은 이후 거란, 여진과 함께 섞여 살거나 고려로 망명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