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어린 시절 지구본을 돌려가며 세계에 어떤 나라들이 있는지 살펴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북반구의 한 켠에 위치한 유럽 대륙에는 프랑스, 영국,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 이탈리아라고 적힌 글자 아래 서로 구분되는 색으로 칠해진 지역이 오밀조밀 붙어 있었죠. 이처럼 우리에게는 세계를 인식할 때 ‘국가’ 단위로 인식하는 오랜 습관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 중세 유럽인들은 국가 단위로 사고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있었고 왕이 다스리는 지역도 있었지만, 왕에게는 조세와 군사권 등 일정한 영토에 대한 배타적인 지배권한이 없었습니다. 지방의 제후들과 사적으로 맺은 주종관계에 따라 주인으로서의 인적 권리를 누렸을 뿐이죠.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에서는 근대 국가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전문적인 군대를 만들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효율적 징세 체제를 마련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적 행정기구가 등장했던 것이죠.
16세기와 17세기는 유럽에서 가장 전쟁이 자주 일어났던 시기였습니다. 17세기에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던 시기는 고작 4년에 불과했어요. 유럽에는 프랑스, 영국, 에스파냐, 한자 동맹의 교역 도시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 독일의 제후국들, 부르고뉴 공국, 스위스의 산악 공화국,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등 수많은 정치 단위들이 존재했고 이들은 쉬지 않고 서로 싸웠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신교파와 구교파로 갈라진 뒤로는 더 열성적이었죠. 이렇게 경쟁적인 상황에서 전쟁을 위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할 방법을 고민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했을 겁니다. 게다가 화약무기가 등장하면서 고급 군사기술을 개발하고 상비군을 유지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점점 더 많은 돈이 필요했던 것이죠.
전쟁을 위해 자원을 동원하는 방식은 국가마다 조금씩 달랐습니다. 예컨대 프랑스는 절대적 왕권을 기반으로 봉건귀족을 중앙의 관료시스템에 포섭했고, 왕이 영주들을 대신해 농민들의 자원을 수취하는 형태를 취했습니다. 앙리 4세는 프랑스 내부의 종교갈등을 봉합하고 전문가들로 구성된 효율적 행정기구를 정비했습니다. 지방 영주들의 성채를 파괴하는 등 귀족들의 군사적 권한을 약화시키기도 했죠. 1643년 즉위한 루이 14세는 ‘절대주의’를 추구해 귀족들을 왕권에 철저히 복종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세적 방식으로 농민들에게서 천문학적 군사비용을 수취하려 했기 때문에 농민들의 사정이 갈수록 나빠졌습니다. 게다가 귀족들이 관료시스템을 점유하고 매관매직과 세습의 행태를 보여주면서 징세 체계가 상당히 비효율적이게 변해갔죠. 결국 프랑스는 얼마 가지 않아 혁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네덜란드는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16세기 초, 네덜란드는 에스파냐 국왕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러다 펠리페 2세의 강압적인 친-가톨릭 정책에 반발했던 네덜란드의 귀족들과 신교도들이 독립전쟁을 일으키고 1579년에 ‘네덜란드 공화국’을 선포합니다. 이 공화국은 규모가 작았지만 매우 효율적인 방식으로 전쟁을 위한 자원은 동원했습니다. 신교도 주민 대부분이 독립을 원했고 전쟁과 전쟁을 이끄는 지도자들을 지지했던 덕이었죠. 특히 엘리트들은 국가가 전쟁뿐만 아니라 대항해 시대로 열린 해상 교역로를 확보하고 상인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들에게 세금은 경제적 부담이 아니라 유용한 투자처였던 셈이죠.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세율을 유지하면서도 조세 폭동이나 지방의 반란 없이 근대에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네덜란드 정부는 해외무역회사에 특허장을 발급해주면서 부수적인 재정 수입을 확보하기도 했고 채무상환과 신용에 신경을 쓰면서 낮은 이율로 민간에서 돈을 조달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천문학적인 빚을 갚지 않아 점점 더 높은 이자를 물어야 했던 프랑스와 대비되는 지점이었죠. 여하튼 이러한 국가와 상업의 결합은 17세기에 네덜란드가 놀라운 경제적 성공을 거둔 비밀이었습니다.
잉글랜드도 네덜란드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습니다. 잉글랜드의 봉건귀족들은 이미 상업적 농업을 이끌며 어느 정도 부르주아지화가 되어 있었습니다. 자급자족의 농업에 만족하지 않고 잉여생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줄 알았어요. 14세기부터 발달한 양모 산업이 국제무역의 주요 물품이었던 덕이었죠. 또 해상무역을 중시했던 엘리자베스 1세 시절에 성장한 상공업계층도 두터웠습니다. 이들은 의회를 장악했고 프랑스식의 왕권신수설과 절대주의를 신봉한 찰스 1세가 무분별하게 과세를 하려 하자 반란을 일으켜 그를 처형했습니다.
이후 몇 번의 부침을 겪으며 1689년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권리장전이 제정되었고 잉글랜드는 입헌군주제 국가로 거듭났습니다. 이로써 영국의 지배계급과 정부는 강력한 해군을 유지하고 군사비용을 아낌없이 지출한다는 공통의 목표를 지니게 됩니다. 엘리트들은 높은 수준의 자기과세를 용인했고, 정부는 잉글랜드 은행을 설립해 안정적으로 국가채무를 관리하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돈을 거침없이 쓸 수 있게 된 영국은 그 돈으로 강력한 해군을 건설했고 네덜란드를 밀어내고 해상 무역의 절대강자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