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을 강요할수록 기억해야 할, 천안문 사건

‘천안문 사건’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제일 먼저 무엇이 떠오르는가? 탱크 앞에 서있는 남자의 사진, 혹은 세계적으로도 아주 유명한 ‘문화대혁명’과도 관련 있는 사건 정도일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는 보통 비닐봉지 두 개를 들고 탱크 앞을 가로막은 ‘탱크맨’ 사진 속 모습이다. 이러한 천안문 사건의 구체적인 배경과 사건 발생 이후 중국 내에서의 인식과 평가, 더 나아가 우리가 천안문 사건을 잊지 않고 꾸준히 기억해야 하는 이유까지 낱낱이 파헤쳐보자.

천안문 광장에 진입하는 탱크 행렬을 맨몸으로 막아선 청년

천안문 사건의 추모 열기, 중국 공산당 정부도 꺾지 못했다!

천안문 사건은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중국이라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바라는 사람들의 시위‘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문장이 천안문 사건을 요약하는 완벽한 문장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점도 있다.

1989년 4월 중순, 당시 중국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후야오방(공산당 총서기)은 “공산당의 1당 통치는 포기하지 않지만 중국이 조금은 더 민주화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중국의 많은 대학생들이 후야오방의 생각을 옹호했다. 이렇게 중국의 민주화를 열망했던 대학생들과 시민들의 주도로 1989년 4월 15일 천안문(톈안먼) 광장에서 시작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을 ‘천안문 사건’이라고 일컫는다. 이 대학생들은 5월부터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을 시작했고 사회·경제적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상황 속 중국 내 여러 곳에서 시위들이 본격화됐다.

단식과 시위의 열기가 거세지자 중국 공산당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한다. 또한 군대와 전차 등을 동원해 이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유혈로 진압을 시도했고 그 결과 항쟁은 6월 3일에서 4일로 넘어가는 새벽 무렵, 비극적으로 막을 내린다. 천안문 사건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대거 참여해 사건의 성격이 범대중적 시위였다는 점에서 추모 열풍이 전국적으로 번지게 된다. 이에 정부는 천안문 사건을 두고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반공’ 세력의 행위로 몰아갔다.

우리가 아는 ‘천안문 사건’은 사실 1차가 아닌 2차라고?

천안문 사건은 크게 1차와 2차로 나뉘고 이는 학계에서도 구분돼 불리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사건의 전개는 제2차 천안문 사건이다. 실제로 우리가 흔히 ‘천안문 사건’으로 표현하는 민주화 운동은 대부분 ‘2차’ 천안문 사건을 의미한다. 그럼 1976년 발생한 1차 천안문 사건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있었을까?

1976년 저우언라이(주은래) 총리 사망 당시는 문화대혁명 말기로서 중국 내부에서 권력 분쟁이 있었던 시기다. 10년간의 문화대혁명 속에서 중국 사람들은 많이 지치게 된다. 그래서 저우언라이 총리가 서거한 후 추모의 마음을 담아 천안문 광장에서 시위를 하게 되는데 이를 두고 ‘제1차 천안문 사건’이라 말한다.

이후 마오쩌둥이 죽게 되고 1978년까지 시위와 항쟁의 분위기가 지속되면서 문화대혁명을 끝내고 더 나은 중국을 위한 ‘개혁 개방’으로 이어지게 된다. 즉, 1차 천안문 사건에서 발생한 흐름과 2차 천안문 사건이 연결된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천안문 항쟁 당시 5월 29일에 대학생들의 주도로 건립된 민주주의의 여신상

중국의 천안문 사건 검열, 상상을 초월할 정도!

현재까지도 중국 정부는 천안문 사건에 대한 추모를 쉬쉬하는 상태다. 추모와 관련한 검열이 매우 심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천안문 사건을 검색하면 흔히들 아는 탱크맨 사진, 민주의 여신상 사진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천안문 사건의 발원지인 중국에서 같은 플랫폼을 이용해 천안문 사건을 검색하더라도 천안문 광장의 관광객 사진이 나온다. 천안문 사진은 확인할 수 있지만 천안문 사건과 관련된 사진은 이미 검열이 이뤄진 탓에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외에도 천안문 사건 검열과 관련해 유명한 일화들이 많다. 일례로 중국 사람들은 천안문 사건이 일어났던 1989년 6월 4일을 숫자로 ‘8964’로 표현한다. 또는 ‘89년 봄의 정치 풍파’ 등으로 말하기도 한다. 직접적으로 천안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없고 우회적으로 돌려서 표현하는 것이다. 매년 5월 말 즈음 되면 ‘6월 4일’을 검색할 수 없게끔 검열하기도 했다. 이에 ‘5월 35일’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표현조차 금칙어가 됐을 만큼 중국의 검열은 상상을 초월한다.

심지어 상하이 주가 지수가 금칙어가 된 사례도 있다. 1989년 6월 4일의 23주년인 2012년 6월 4일, 중국 주요 주가 지수 중 하나인 상하이 종합지수가 공교롭게도 ‘64.89’포인트 떨어진 것이다. 또한 세계적인 미국 가수인 테일러 스위프트와 관련된 이야기도 있다. 그녀는 자신의 생년인 1989년과 이니셜인 알파벳 T와 S를 따서 ‘1989 T·S’라고 새긴 후드티를 판매했다. 그런데 후드티 속 로고가 천안문 사건의 발생 연도와 천안문 광장(Tian’anmen Square)과도 이니셜이 동일하다는 이유로 논쟁이 있을 정도였다.

천안문 사건을 기억하려면? 저항의 목소리를 내자!

1989년 천안문 사건을 통해 중국 국민들이 요구하고자 한 것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대학생 계층은 중국 사회의 민주화(더 많은 시장화)를 주로 요구했으며, 시위에 합류하게 된 시민들의 경우 계획 경제로 인한 관료들의 부정부패 척결을 요구했다. 여기에 덩 샤오핑의 실용주의를 대변하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수사적인 발언이 중국의 개혁 개방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천안문 사건의 발단은 후야오방의 죽음이었지만 1987~88년 당시 중국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국민들의 삶이 힘들어지게 됐고 이와 관련한 정치적 불만 또한 천안문 사건의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는 망각을 강요당했다고 볼 수 있는 이 천안문 사건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는 특히 중국 사람들에게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도 생각해보면 망각을 강요당한 사례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있다. 국가는 계속해서 이런 사건들을 오염시키고 숨기고자 했으나 일각에서는 끊임없이 수면 위로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의 결과로 저항의 자원과 사상의 자원을 끌어올릴 수 있었고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중국의 천안문 사건 역시 이러한 노력이 학문적으로만 이뤄지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 실천과도 연결돼야 할 것이다. 현재까지도 천안문 사건을 수면 위로 올리고자 하는 사회적인 노력이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2년 11월 중국 정부의 방역 정책에 대학가와 시민들의 항의로 시작된 ‘백지시위’ 등 억압과 검열을 두고 저항의 목소리를 내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정부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다면 중국 사람들은 89년의 천안문 사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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