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오 리치와 동서양의 ‘정중한’ 만남

흔히들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오늘 소개할 인물인 ‘마테오 리치’ 역시 다 빈치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르네상스 프리스트(priest, 사제)’로서 활약한 바 있다. 중국으로 건너가 개신교 선교 활동을 펼친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신부 마테오 리치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펴보자. 그리고 리치만의 독특한 선교 방식이었던 ‘적응주의’가 무엇이며 이러한 적응주의가 선교 활동에서는 어떻게 발현됐는지도 함께 알아보자.

다방면의 지식에 능통했던 언어 천재, 마테오 리치

도입부에서 언급했듯이 마테오 리치 신부는 명·청 시기 중국 천주교사에서 가장 걸출한 인물로 손꼽힌다. 우선 리치는 언어 천재였다고 한다. 서양의 선교사들이 중국에 왔을 때 초기엔 사실 중국어 익히는 일이 커다란 숙제였다. 그러나 리치는 서양인으로서는 특히나 어려웠을 중국어를 단시간에 잘 습득했을 뿐만 아니라 어려운 고전 유가 경전을 읽고 번역까지 할 정도로 언어 이해 능력이 출중했다.

또한 수학, 천문학, 지리학 등의 분야에서도 최신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각종 저술 활동을 통해 중국 선교에 중요한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실제로 리치는 후대에도 전해지는 유명한 한문 교리서 『천주실의』를 비롯한 다수의 서학서를 직접 작성했다. 이렇게 중국 선교에서 큰 역할을 한 리치가 만일 없었다면 명나라 말기 예수회의 중국 선교는 아마 성공적으로 이뤄지지 못했을 수도 있다.

태엽식 자명종으로 황제의 관심을 끌다?

여러 방면에서 재능을 드러낸 리치 신부가 선교 활동을 펼치는 과정은 어떠했을까? 1582년 리치는 마카오에 도착하게 됐고 이듬해인 1583년 광동성에서의 활동을 시작으로 1601년, 마침내 북경에 천주당 건립이 가능하다는 허가를 받게 된다. 즉, 북경의 첫 번째 천주당 건립까지 거의 20여 년이 걸린 셈이다.

이때 건립했던 천주당이 바로 오늘날 북경 선무문 지구에 위치한 ‘남당’의 시초가 된다. 북경 남당에 가게 된다면 리치를 기리는 기념물이 세워진 것을 볼 수 있다. 만약 여러분이 북경으로 여행을 갈 기회가 있다면 자금성 일정에 맞춰 남당을 들러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물론 1601년 당시의 천주당 건물의 경우, 오늘날 남당에 가서 확인할 수 있는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은 아니었으며 단층의 일반적인 중국식 기와집 건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리치는 본래 이탈리아인이었으므로 중국에서 체류하기 위해선 별도의 허가 절차를 거쳤어야 했다. 이와 관련된 한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북경에서 황제 알현을 준비하던 리치는 당시 명나라 황제였던 만력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명종을 준비했고 실제 진상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태엽식 자명종 시계의 특성상 계속 작동시키려면 수시로 태엽을 감아주는 등의 관리가 필요한데 서양인 말고는 이 시계를 만질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중국 조정의 입장에서 서양 사람을 곁에 두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리치가 만들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후에는 리치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들이 수학과 천문 역법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점이 선교사들로 하여금 궁정에 머무르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서양인들이 중국에서 천문을 담당하는 관리자로서 계속 일하게 되는 시기가 리치의 선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리치만의 유연한 선교 방식, ‘적응주의’

중국에서 리치가 주도한 선교 활동에서 가장 결정적인 장면이라고 하면 바로 승려 복장에서 유학자 복장으로의 ‘전환’일 것이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승려 복장에서 유학자 복장으로 변화한 것은 단순히 외관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뿐만 아니라 선교의 방법론 자체를 바꾼 대단히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전환에는 대략 세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 번째는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목적, 두 번째는 불교와 거리를 두는 목적, 그리고 세 번째는 유가 사상과의 친연성을 강조하는 목적이었다.

이렇게 리치가 유학생 복장으로 생활하고 조상의 제사를 허용하면서 유연성을 보인 선교 방식을 ‘적응주의’라고 한다. 리치의 적응주의가 선교 활동에서 어떤 식으로 발현됐는지는 그의 한문 저작들이 가진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 저작들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중국 문인들이 관심을 갖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기반하여 리치가 저술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교우론』은 리치의 저술 중 가장 먼저 집필되고 큰 반향을 일으킨 저작으로 손꼽힌다. 실제 중국 문인들의 큰 공감을 얻은 리치의 『교우론』은 동서양의 『우정론』을 바탕으로 저술됐으며 중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에까지 전해졌고 이후 동양 내 여러 지역에서 진행된 우정에 대한 담론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줬다. 특히 스토아 철학과 유가 전통 간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우정’이라는 동서고금의 공통적 주제를 통해 두 사상을 하나로 융합시켰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의가 있다.

지적 식민주의 NO, 평화로운 호혜적 만남 YES!

리치의 선교 활동을 두고 비판의 시선도 존재했다. 어떠한 연구자는 예수회의 활동을 ‘지적 식민주의’에 불과하다는 날카로운 비평을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예수회가 중국 선교에 임하는 접근법은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사들에게서 나타나는 소위 ‘선교 제국주의’ 태도와는 분명 구분되는 것이었다.

그 근거를 살펴보자면 첫째, 선교 과정에서 예수회는 우월한 문명인 유럽이 열등한 아시아를 계몽시킨다고 하는 ‘문명화 사명’ 등의 생각을 내세우지 않았다. 둘째,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중국의 언어, 사상, 문화를 깊이 이해하는 가운데 세운 예수회의 선교 노선을 ‘적응주의’로 규정했다. 셋째, 중국이 구축한 고도의 문명, 사회, 문화 등을 경험한 예수회가 중국의 전통 사상과 지적 유산 속에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맞닿은 지점이 있다는 점을 활용해 이를 적극적으로 이론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정리하자면 유럽의 종교를 일방적으로 이식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에게 소통이 가능한 방식으로 소개함으로써 이들이 가톨릭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먼젤로는 16세기 예수회의 중국 선교를 두고 ‘중국과 서양의 위대한 만남’이라고 했다. 그중에서도 이 ‘정중한 만남’이라는 표현은 더욱 핵심을 관통했다고 볼 수 있다. 명말 중국 사대부와 예수회의 만남이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이질적인 문화 전통과 사상을 가진 상대방에 대해 기꺼이 서로 존중을 표하고 더 나아가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태도를 견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리치와 동서양의 만남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 참조할 수 있는 평화롭고 호혜적인 만남의 대표적인 사례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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