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천사를 보여달라! 사실주의

1814년 나폴레옹 정권이 실각함에 따라 프랑스 제1제정이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혁명으로 쫓겨났던 부르봉 왕조가 다시 채우게 됐죠. 오랜 기간 망명 생활 끝에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루이 18세는 양원제 의회와 내각제를 규정하고, 언론, 사상, 신앙의 자유와 재산의 불가침을 규정하는 ‘1814년 헌장’을 수여하는 등 온건 정책을 펼쳤는데요. 뒤를 이은 샤를 10세는 “영국왕과 같은 조건으로 국왕이 되느니 차라리 숲에 가서 도끼질을 하는 게 낫다”며 망명 귀족에 대한 보상 정책, 반정부의 자유주의적 의회 해산, 신문과 언론에 대한 탄압, 선거법 개정 등 시민계급에 대한 각종 탄압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그 결과 1830년 7월에 다시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고, 샤를 10세는 다시 망명길에 오르게 되죠.

빈 자리를 채운 것은 왕족이긴 하지만 족보상으로는 먼 친척에 속하는 루이 필리프였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시민 계급에 대한 처우를 소홀히 하면서 1848년에 결국 왕좌에서 물러나게 되었죠. 이후 프랑스는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화국이 된 뒤 대통령이 된 것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이었습니다. 그는 임기가 끝날 무렵,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의 삼촌처럼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요. 우리는 그를 나폴레옹 3세라고 부르며, 이 시기를 ‘제2제정’이라고 이야기하죠.

이 즈음 유럽은 기술 문명이 발전하고, 민주주의 제도가 차츰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소위 ‘현대’라고 부르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죠. 이런 시기에 시대착오적인 ‘황제’ 자리를 차지한 나폴레옹 3세는 부르주아 계급의 입맛에 맞는 정책들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방사성 도로가 나 있는 오늘날 파리의 형태를 만든 파리 대개조 사업을 시작했으며, 세계 곳곳으로 식민지를 넓혀 갔죠.

예술에 있어서도 혁명적인 변화들이 감지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과는 다른 화풍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제도권의 권위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한 거죠. 구스타프 쿠르베는 이런 변화에 선봉장으로 선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천사를 그리려면 나에게 천사를 보여달라”는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한데요. 이전 시대와 아카데미로 대표되는 제도권 예술이 추앙한 역사화, 종교화, 주제화 등이 대중을 현실의 사회적 문제와 멀어지게 한다고 여겼다고 알려지죠. 그는 결국 지나치게 이상적이거나 신비로운 것을 배척하고 실용적이며 사실적인 그림이라는 의미의 ‘사실주의’를 개척하게 됩니다.

더불어 그는 국가가 ‘좋은’ 작품을 골라 대중들에게 전시하는 살롱전의 개념을 파괴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1855년 파리 만국 박람회 때 자신의 작품이 채택되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은 뒤, 그 항의 표시로 박람회장 근처에 ‘리얼리즘관’이라는 이름의 개인전을 개최한 것이죠. 전시회의 판매 실적은 그리 좋지 못했지만 홍보 효과는 탁월했습니다. 당대 주류를 차지하고 있던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진영으로부터 매서운 비난을 받았지만, 오히려 이것이 그를 사실주의의 선구자 입지를 굳히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구스타프 쿠르베, 〈돌 깨는 사람들〉, 1849년, 캔버스에 유채, 165×257cm, 베를린: 국립회화관

그의 그림 속에는 일상의 일에 몰두하고 있는 노동자 계급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돌 깨는 사람들>의 경우, 길을 가다 작업 중인 인부들을 발견하곤 다음 날 그들을 자신의 작업실로 불러 그림을 그렸다고 알려지죠.

구스타프 쿠르베, <안녕하십니까, 쿠르베 씨>, 1854년, 캔버스에 유채, 129×149cm, 몽펠리에: 파브르 박물관

또한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예술가의 우월성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본인의 작업실을 그린 그림 <내 화실의 내부>은 자신을 중앙에 배치하고, 그 왼쪽에는 작품의 주제가 되는 일반인들을, 오른쪽에는 파리 예술계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을 그려 넣었습니다. 즉, 사실세계와 예술세계를 연결하는 존재가 바로 자신이자 예술가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죠.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에서도 이 생각은 이어집니다. 가운데 선 인물은 당대 예술가들을 다수 후원했던 브뤼야스인데요. 그림 속에서 예술가인 쿠르베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습니다. 쿠르베는 여기에서도 다시 한 번 예술가의 특별함과 우월성을 강조했던 것이죠.

오노레 도미에, 〈가르강튀아〉, 1831년, 석판화, 21×30cm, 파리: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

사실주의 화가이자 판화가인 오노레 도미에는 ‘크레용을 집은 몰리에르’, ‘캐리커쳐의 미켈란젤로’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는 석판화가로 일하던 1830년 시사 주간지인 ‘라 카리카튀르(La Caricature)’의 창간에 맞춰 시사만화가로 데뷔했는데요. 16세기의 작가 라블레가 쓴 소설 속 거인을 당시 국왕이었던 루이 필리프에 빗대어 그린 그림 <가르강튀아>로 인해 6개월간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이 그림에서 그는 국왕을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입만 벌린 채 세금을 삼키는 거인으로, 정치가와 법관들은 왕의 배설물 주위에 꼬이는 추악한 인물들로 그려졌는데요. 결국 1834년 라 카리카튀르는 검열로 인해 폐간되고 맙니다.

이후 도미에는 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보다는 사람들의 실제 생활상을 그리는 데에 전념했습니다. ‘르 샤리바리(Le Charivari)’지에는 그가 제작한 석판화 3382점이 발표되기도 했죠. 그리고 1840년대에 들어 그는 정치적인 주제를 되찾아옴과 함께, <삼등 열차의 승객> 등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을 그려냈습니다. 당대의 시인이자 비평가였던 샤를 보들레르는 그를 ‘풍자만화에서뿐만 아니라, 근대미술의 모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라고 극찬하기도 했죠.

장 프랑수아 밀레, <이삭 줍는 여인들>, 1857년, 캔버스에 유채, 83. x110cm, 파리: 오르세 박물관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또다른 인물은 장 프랑수아 밀레입니다. 그는 바르비종파의 창시자로 유명한데요. 바르비종파라는 명칭은 밀레와 일련의 화가들이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이란 지역에서 작품활동을 벌였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씨 뿌리고 수확물을 거두는 농민들의 그림을 주로 그렸습니다. 그가 그림을 내놓은 당시 사람들은 그의 그림이 ‘불온하다’며 손가락질했습니다. 특히 프랑스 사회의 보수주의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요. 하지만 차츰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어 가며 말년에는 상당한 성공과 명성을 얻었죠. 이러한 명성에 힘입어 그는 1868년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사실주의의 발전과 인상주의 태동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이후의 작가인 빈센트 반 고흐와 카미유 피사로가 그에게 큰 영향을 받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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