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신고전주의의 대표자, 다비드와 앵그르

프랑스 신고전주의의 대표자, 다비드와 앵그르

프랑스 신고전주의의 대표주자인 자크 루이 다비드는 폼페이 유적 발굴이 시작된 1748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20대 시절인 1776년 로마 상 장학금을 받아 이탈리아로 유학을 다녀왔는데요. 그곳에서 수많은 고전 미술과 당시 유행하던 그리스 복고주의 미술품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이를 두고 “마치 백내장 수술을 받은 것 같았다”고 회상합니다. 흐릿하게 보이던 눈이 마치 맑게 개인 것처럼 환하게 밝혀졌다는 것이죠.

이후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신고전주의의 교과서로 불릴 만한 작품들을 그려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780년대에는 주로 그리스 고전기와 로마 공화정 시대를 배경으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요. 이런 주제의 그림을 통해 엄격한 윤리관과 자기 희생 등을 강조하며 사람들의 호응을 널리 얻게 되었습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캔버스에 유채, 19세기경, 루브르 박물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역시 이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그림 속에 담긴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때는 로마가 아직 거대한 제국이 되기 전이었습니다. 어느 날 로마는 이웃 부족과 싸움을 하게 되었는데요. 당시에는 전면전이 아닌 몇몇 전사가 나와 대표로 싸워 양 부족의 승부를 결정짓기도 했다고 합니다. 로마에서는 호라티우스 형제가 대표로 나서게 되었는데요. 하필이면 상대 부족에서 호라티우스 집안의 딸과 결혼하기로 약조한 남자가 대표로 나서게 됐다고 하죠. 결국 호라티우스의 입장에선 아들이든 사위든 어느 한 쪽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결국 출전한 세 아들 중 두 사람이 죽고, 사윗감마저 죽게 되었죠. 이윽고 살아 돌아온 아들은 적 때문에 슬퍼하고 있다는 이유로 호라티우스의 딸마저 죽여버렸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비극적 사랑의 결말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방탕함 대신 자기희생을 강조하던 당대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이 그림은 몇 년 뒤 도래한 프랑스 혁명의 시기에는 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결의하는 모습으로 해석되기도 했는데요. 시기에 따라 같은 작품도 달리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뒤, 다비드는 혁명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예술 역시 공화국의 선전을 위해 사용되었는데요. 다시 말해, 그는 기존의 화가들처럼 신화나 고대사가 아닌 동시대의 정치적인 이슈를 자신의 화폭에 재현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의 화풍이 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민혁명가를 묘사하는데 있어서도 영웅적인 이상화와 고전주의적 양식이 그대로 적용되었던 것이죠.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캔버스에 유채, 1793년경, 랭스미슬관

이를 대표하는 작품이 바로 <마라의 죽음>입니다. 다비드의 친구이자 혁명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마라는 급진주의 측의 대표격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피부병을 앓고 있어 평소 반신욕을 하며 업무를 보는 일이 많았는데요. 왕당파의 지지자였던 한 여성이 탄원자로 가장해 그를 암살했습니다.

다비드는 혁명의 희생자인 마라의 마지막을 마치 어느 종교 지도자의 순교처럼 장엄하게 그려냈습니다. 그림 속 마라는 욕조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감은 채 죽음을 맞이한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손에는 ’마리 안네 샤를로트 코르데가 시민 마라에게, 비천한 제게 친절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의 거짓 편지를 쥐고 있죠. 이 그림을 통해 다비드는 마라의 훌륭한 인품과 결백함을 강조한 겁니다.

하지만 1800년대 이후 그의 행적은 180도 뒤바뀝니다. 로베스 피에르가 실각하고 사형 당한 뒤, 그는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요. 이후 변화한 정치 상황에 적응하고 황제 나폴레옹의 수석화가가 되었습니다. 혁명기의 단순한 구도 대신 황제의 취향에 맞춘 화려한 양식으로 그림이 그려졌으며, 황제 즉위가 못마땅해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은 나폴레옹의 어머니가 그림 속에는 마치 참석한 것처럼 그려졌죠. 하지만 결국 나폴레옹 역시 몰락하게 되었고, 다비드는 후폭풍을 피해 벨기에로 망명했습니다.

이후 프랑스 신고전주의를 이끈 인물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였습니다. 그는 다비드의 총애를 받은 제자였는데요. 스승의 강건한 구조와 달리 섬세하고 유려한 선과 화풍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당대 유행하던 또다른 화풍인 낭만주의 화가들을 향해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악마”라고 외칠 정도로 강건한 신고전주의자였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신은 그리스와 르네상스적인 그림에서 벗어난 작품을 여럿 그리기도 했습니다.

도미니크 앵그르, <그랑드 오달리스크>, 캔버스에 유채, 1814년, 루브르 박물관

그 예로 앵그르의 대표작인 <그랑드 오달리스크>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수많은 궁녀를 할렘에 모아놓고 즐겼다는 술탄의 후궁을 상상하며 그린 그림입니다. 작품이 공개된 직후 그는 “그녀의 척추가 두 개는 더 있는 것 같다”는 비평가들의 혹평을 받았는데요. 이는 그림 속 여성의 육체적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해 허리를 길게 늘여 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마니에리즘 시기의 작품처럼 말이죠. 하지만 이런 혹평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 여성이 그 누구보다 관능미를 물씬 뽐내고 있다는 것만큼은 부정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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