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곧 색채, 인상주의

쿠르베의 개인전이 열린 지 8년이 지난 1863년, 사실주의의 뒤를 잇는 새로운 미술 사조가 전면에 등장합니다. 이 해는 ‘낙선자 살롱전’이 열린 해였는데요. 낙선자 살롱전이란 살롱전에 떨어진 작품을 따로 모아 대중에게 공개한 전시회였죠. 이는 역사, 신화 등 전통적인 주제의 그림만을 가치 있게 평가한 살롱전 심사 기준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일종의 고육지책으로 열리게 된 행사였는데요. 이 전시회에 사실주의 작품과 함께 ‘인상주의’ 작가들의 그림이 대거 전시되게 되었습니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1863년, 석판화, 264.5×208 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에두아르 마네의 대표작 <풀밭 위의 점심식사> 역시 이때 전시된 작품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작품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풀밭 위에 앉아 있는 나체의 여성은 이전 시대의 누드와 달리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그려졌고, 관객을 직접 응시하는 듯한 시선 또한 작품성보다는 외설에만 초점을 맞춘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죠.

클로드 모네, <인상, 해돋이>, 1872년, 캔버스에 유채, 63×48 cm, 파리: 마르모탕 미술관

이후 모네를 비롯한 여러 인상주의 화가들은 ‘화가, 조각가, 판화가의 무명 예술가 협회’라는 그룹을 만들고 전시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전시회는 낙선자 살롱전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고 진보적인 작품을 전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는데요. 당대의 신문기자였던 루이 르흐와는 이 전시회를 찾아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본 뒤  ‘본질보다는 인상을 그렸다’며 야유섞인 비평을 내놓았죠. 하지만 그의 의도와 다르게 이들의 그림은 평생 ‘인상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후 인상주의는 거의 모든 근대 미술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미술사조로 자리잡게 됩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유산인 원근법과 균형잡힌 구도, 이상화된 인물, 명암 대조법 등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대신 색채와 빛을 통해 짧은 순간에 포착된 사물 혹은 인물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했죠.

그렇다면 이들은 대체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요? 이는 당대보다 조금 앞선 17세기의 과학 혁명에서 그 씨앗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뉴턴은 실험을 통해 빛이 하나의 색이 아닌, 여러 색이 섞인 혼합광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했는데요.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관습적인 기준에 따라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색채와 인상을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그럼 이제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들을 만나보죠. 첫 번째 인물인 에두아르 마네는 흔히 근대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화가입니다. 그는 사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인상주의 혁명의 선구자가 될 의도가 없었습니다. 정통의 화가 수업을 받았으며, 그 역시 평생 공식 미술계의 인정을 받고자 노력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비평가들은 그의 그림이 매우 상스러우며 수치스러운 장난질에 불과하다고 손가락질 했습니다.

앞서 우리가 본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 대한 당시의 평가 또한 마네의 입장에선 조금 억울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마네 생각엔 이 그림이야말로 보수적 비평가들이 그토록 예찬하던 전통과 관슴을 충실하게 따른 작품이기 때문이었죠. 그는 라파엘로의 그림 <파리스의 심판> 중 한 부분을 따라 그리되, 이를 현대적으로 변형하여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완성했습니다. 또한 이 그림은 16세기 베네치아 화파의 창시자인 조르조네의 <전원의 합주>와 비교되기도 했는데요. 이는 두 그림 모두 옷을 입은 남자와 옷을 벗은 여자가 야외에서 뒤섞여 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이 그림은 너무나 현실적이었던 탓에 결국 소란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대관절 우리 파리지앵이 알몸으로 밖에 나와 있다니 말이죠!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년, 캔버스에 유채, 191x130cm,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

그럼에 불구하고 마네는 더욱 과감해졌습니다. 2년 뒤인 1865, 지금까지 유래 없던 문제작 <올랭피아>를 전시한 거죠. 평론가들은 그를 마구 비난했지만, 사람들의 태도는 조금 달라져 있었습니다. 음란한 그림이라며 손가락질을 하면서도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모델로 한 그림이자, 매춘부를 그린 이 그림을 보기 위해 긴 줄을 늘어선 거죠.

훗날 인상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젊은 화가들 역시 그를 추앙했습니다. 이전 시기까지 이어온 이상화된 신화의 모습 대신 현실적이고 꾸밈없는 일상의 묘사, 명료하고 평평한 색면과 사실적인 기법, 원근법을 최소화한 방식을 적용했기 때문이죠. 또다른 인상주의 화가인 르누아르는 ‘회화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며 마네를 향한 지지와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두 번째 화가는 클로드 모네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이 인상파라는 명칭을 얻게 만든 장본인이죠. 우스갯소리로 인상주의의 두 대표화가 이름을 따서 마네모네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요. 실제로 두 사람의 그림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이름마저 비슷하죠. 실제로 마네는 모네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못마땅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고 합니다. 자신과 이름을 헛갈릴 수도 있지 않겠냐면서요. 물론 이후 두 사람은 서로 만난 뒤부터 좋은 관계를 유지했죠.

클로드 모네, <양산을 든 여인>, 1875년, 캔버스에 유채, 100x81cm, 워싱턴D.C.: 국립미술관

모네는 청소년기에 상업 화가이가 풍자 만화가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가 그린 그림은 10~20프랑 정도에 팔렸는데요. 당시 노동자의 일당이 5프랑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수입을 올린 셈입니다. 이후 그는 외젠 부댕이라는 화가을 만나 그림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야외에서 직접 풍경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앙플레네르(En Plein Air)’ 기법을 배우게 되었고, 네덜란드의 풍경화가 바르톨드 용킨트를 만나 대기 중의 빛을 포착하는 방법을 사사받기도 했죠.

그는 아카데미에 들어가라는 주변 사람들의 권유를 거절하고, 샤를 글레이르의 아틀리에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피사로, 바지유, 르누아르, 시슬리 등과 함께 인상주의 양식을 만들어 내죠. 한때 그들은 곤궁함으로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모네는 자살까지 시도할 정도였죠.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그들의 작품이 인정 받으면서 부와 명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많은 화가들이 인상주의의 한계를 자각하고 화풍을 바꾼 뒤에도, 모네만큼은 끝까지 ‘빛은 곧 색채’라는 자신의 인상주의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특히 말년인 1890년대 이후부터 모네는 하나의 주제로 여러 장의 그림을 그리는 연작을 다수 제작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건초 더미를 그렸습니다. 약 1년에 걸쳐 25점이 넘는 그림이 그려졌죠, 다음해에는 강변에 줄지어 선 포플러 나무가 소재가 되었고, 이후에도 대성당, 수련 등을 그려냈죠. 그는 이를 통해 같은 사물이 빛에 따라 어떻게 달리 보이는지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같은 장면을 그린 것임에도 그린 날짜와 시간, 날씨 등에 따라 다른 그림들이 펼쳐집니다. 어쪄면 그는 당대의 또다른 화가 폴 세잔의 말처럼 ‘신의 눈을 가진 유일한 인간’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 번째로 소개할 화가는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도자기 공장에 들어가 도자기에 무늬를 그려넣는 일을 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화가가 되고자 꿈을 키운 그는 조금씩 모은 돈을 가지고 글레이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곳은 우리가 모네에 관해 이야기할 때 설명 들은 것처럼 훗날 인상파 운동을 지향한 젊은 화가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죠.

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 1875년, 캔버스에 유채, 100x81cm, 워싱턴D.C.: 국립미술관

그의 그림이 가진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뛰어난 색채감입니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물랭 드 라 갈레트>는 마치 ‘지상을 신들이 사는 낙원과 같이 묘사한 것’처럼 일상의 유쾌하고 즐거운 순간과 그 속의 사람들을 아름다운 빛과 색채로 표현해냈죠.

1881년 이탈리아를 여행한 그는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의 화풍도 이를 계기로 변화하게 되는데요. 주제는 동시대의 생활상이 아닌 고전적 포즈의 누드화로 옮겨갔고, 담백한 색조와 선명한 윤곽선을 통해 화면 구성에 깊은 의미를 쏟았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독자적이며 풍부한 색채 표현을 되찾아오며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그는 죽는 날까지 예술혼을 불태웠습니다. 만년에 류머티즘성 관절염으로 인해 손이 마비되자 붓을 손목에 묶어 그림을 그렸죠. 따로 조수를 두고 조각 작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르누아르의 화상은 그가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그릴 때면 늘 예전과 다름없이 행복해 보였다며 그의 마지막을 회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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