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12년>이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나요? 이 영화는 뉴욕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자유인 솔로몬 노섭이 납치를 당해 미국 남부로 끌려가게 되면서 시작합니다. 솔로몬은 노예가 되어 한 면화 농장에서 일하게 되는데, 그 와중에 한 감독관의 미움을 받습니다. 감독관은 친구들을 불러모아 농장주(베네딕트 컴버배치 분) 몰래 그를 목매달아 죽이려 하죠. 절체절명의 순간, 솔로몬을 구한 것은 이 한 마디였습니다. “그래도 이 자식은 농장주의 빚보증 담보니까 죽여서는 안 돼.”
부동산도 아니고 노예가 담보라니, 좀 이상하죠? 하지만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에서 노예는 가장 흔한 담보물 중 하나였습니다. 1860년을 기준으로 노예의 가치를 전부 합하면 미국 총 자산의 1/3에 달할 정도였으니, ‘노예담보대출’은 오늘날의 부동산담보대출 만큼이나 익숙한 금융상품이었죠.
우리는 노예제가 야만적인 제도이며, 근대적이고 세련된 자본주의와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임금노동이 도입되기 전 채찍질로 노동을 착취했던 전근대적인 방식이라는 거죠. 하지만 노예와 자본주의의 관계는 그보다 훨씬 더 복잡했습니다. 노예제는 면화산업에 신용을 공급했고 국제금융을 발전시켰으며 현대적 노동관리를 도입했어요. 하나씩 살펴봅시다.
사업을 하려면 투자를 받아야 하죠. 면화 농장주들도 그랬습니다. 돈을 빌려 많은 새로운 땅을 사고 거기서 더 많은 면화를 재배해야 했죠. 영국에서 면공업이 기계화되면서 면화 수요가 가파르게 상승했기 때문에 면화산업은 수익률이 연 25%나 되는 투자처이기도 했습니다. 농장주들은 처음에는 땅을 담보로 돈을 빌렸습니다. 하지만 경쟁이 워낙 치열했기 때문에 더 많은 신용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19세기 초부터 농장주들은 노예를 담보로 은행에서 투자를 받았습니다.
미국의 은행들도 좋아했어요. 수익률과 안정성이 높은 ‘노예담보채권’을 런던과 암스테르담의 선진 금융시장에 다시 팔 수 있었거든요. 별볼일없던 미국의 은행들에게는 쏠쏠한 장사였죠. 노예담보채권은 베어링 은행의 주요 거래품목 중 하나일 정도로 유럽의 금융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금융상품 중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국제적 신용의 공급은 미국의 면화산업을 폭발적으로 성장시켰습니다. 1796년 미국 수출의 고작 2.2%를 차지하던 면화는 1815-1860년에 50% 이상을 차지하게 됐죠.
노예의 노동력을 동원하던 방식도 전근대적이라고만 볼 수는 없었습니다. 농장주들은 단순히 사람을 때리면서 일을 시키지 않았어요. 이들은 치밀한 사업가였고 매질을 하는 정교한 시스템을 만들어 생산량을 엄청나게 늘렸죠. 그중 하나가 “인센티브” 방식이었습니다. 노예 한 명마다 목화 채취량을 측정하고 증감에 따라 벌을 부과하는 것이었죠. 예컨대 하루에 50파운드의 면화를 딴 노예는 다음 날 60파운드만 따도 맞지 않았지만, 하루에 100파운드를 따왔던 노예가 90파운드를 따면 모진 매를 맞았죠. 이 방식이 적용되고 노예 한명이 하루에 채취하는 면화의 양은 50파운드에서 300파운드로 늘었습니다. 6배에 달하는 생산량의 증가였죠. 같은 시기에 면화에서 실을 뽑아내는 방적의 효율성이 4배가량 증가했고 실로 면직물을 짜는 방직이 8배가량 빨라졌어요. 채찍을 통한 생산량의 증가가 기계의 도입으로 인한 증가와 동일한 단위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죠. 이처럼 노예의 노동을 ‘효율적’으로 조직하는 방식은 이보다 뒷시기에 공장을 차렸던 산업자본가들에게도 큰 영감을 제공했습니다.
노예제가 19세기 자본주의 발전과 긴밀하게 얽혀 있었다는 사실은 1837년 금융위기를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노예담보대출은 미국의 주택담보대출이 2008년 금융위기를 불러일으킨 것처럼 전세계적 금융위기를 촉발시켰습니다. 시작은 면화의 과잉생산이었어요. 면화의 가격이 하락하자 노예담보대출의 수익성이 하락했죠. 노예를 담보로 한 채권을 보유하고 있던 런던, 암스테르담, 뉴욕의 금융가들이 채무의 상환을 요구하자, 채권 구매를 중개했던 남부의 은행들을 시작으로 미국의 은행 850개 중 343개가 파산했습니다. 여기에 서부의 부동산 버블이 함께 터지며 실업률이 25%까지 치솟았죠.
우리는 노예제가 일부 탐욕스럽고 야만적인 농장주들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농장주들의 사정은 좀 더 복잡했습니다. 3억 대출을 받아 집을 샀고 수년간 원리금을 갚아가고 있는데 갑자기 집이 도망가네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겠죠. <노예 12년>에서 노예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려 했던 선량한 (그러나 빚쟁이기도 했던) 농장주가 노예제 폐지에 찬성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일찍이 노예제를 폐지한 미국 북부와 유럽의 사람들조차도 상당수는 노예가 도망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을 겁니다. 노예를 담보로 상품화된 무수한 파생상품을 직접 소유했을지도 모르고 그러한 금융상품을 보유한 자기 지역 은행이 파산하는 걸 원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노예는 열심히 목화솜을 따고, 담보가 되어 더 많은 재배지를 제공해주고, 은행이 돈을 벌게 해주었습니다. 19세기 중반까지는 가진 게 땅밖에 없었던 미국은 노예의 희생을 담보삼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산업과 금융을 발전시킬 수 있었죠. ‘자본주의가 확대되어야 민주주의가 증진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죠. 하지만 자본주의는 노예제와 같은 야만적인 제도와도 복잡하게 결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합은 103만명이 죽은 전쟁 없이는 깨질 수 없었을 정도로 강력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