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역시 과거를 대상으로 개연성을 가지고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와 소설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소설은 허구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에서는 서사물을 소설(小說)과 대설(大說)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꾸며낸 이야기인 소설에 대비해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 즉 역사를 대설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역사는 실제 일어난 과거의 사실 가운데 삶의 거울이 될 만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앞서 랑케로부터 꾸준히 지적해온 ‘본래 그것이 어떠했는가?’를 파악하는 학문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처럼 참과 거짓이 먼저 판별이 되어야 그에 기반한 역사가의 주관적 해석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사실관계부터 틀려버리면 주관적 해석의 의미도 바래게 되겠지요. 사실인지 아닌지 직접 보지 않아서 알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최대한 사실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자료를 동원하여 당시를 복원해본 뒤, 그것이 현재에 가지는 의미를 추출하는 작업이 바로 역사가 가지는 소설과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역사학은 객관성과 과학성, 실증성을 매우 중요시합니다. 그러면서 앞서도 말했듯이 역사가의 주관적 해석 또한 몹시 중요하지요. 이러한 역사가의 주관적 해석에는 역사가의 가치관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역사를 보는 관점’, 바로 사관(史觀)이라고 해요. 역사학이 전개되어 오면서 시대별로 다른 특징을 보인 이유는 바로 역사를 바라보는 사관의 차이 때문입니다.
역사학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역사가가 복합적으로 배치하고 해석하는 과정인데, 이를 배치하는 관점에 따라 다른 사관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니까요. 신 중심에서 인간으로 그 지향점이 옮겨가면서 ‘인문주의사관’에서부터 인간을 구속하는 장기지속의 구조를 중시하는 ‘구조사’까지 앞서 살펴본 모든 것들이 역사를 보는 관점인 ‘사관’의 변화에 따라 전개되어온 것이지요.
개별 역사적 사건을 보는 관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관에 따라 1894년에 동학농민군이 봉기했던 ‘사건’은 ‘동학 난(亂)’이 될 수도, ‘동학 혁명’이 될 수도, ‘갑오농민전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광복절’, ‘건국절’ 논쟁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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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사관이 강할수록 역사학은 실천성이 강하다. 사관 자체가 그 시대가 요구하는 “주장”, 즉 호소력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호소력과 실천성이 강한 사관일수록 과거의 진실을 과장하고 왜곡하고 단순화시키는 폐단이 있다. 예를 들어 20세기를 풍미한 민족주의사관은 민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미화시키며, 계급주의 사관은 계급 갈등을 사실 이상으로 과장하는 오류를 범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여기에서 역사학은 중대한 딜레마에 직면한다. 과거의 ‘진실’에 충실하려는 역사가는 사관보다는 실증에 더 몰두하고, 역사학의 현실성에 충실하려는 역사가는 실증보다는 사관 그 자체에 더 집착한다. 이러한 실증과 사관 사이의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 답은 실증과 사관의 양자택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자의 조화와 균형에 있다. 과거의 진실을 가지고 현재를 살피며, 현재의 목적을 가지고 과거를 살피는 끊임없는 왕복적 대화, 즉 역사학은 역사가의 주관성과 사실의 객관성 사이의 절묘한 줄타기이다. - 한영우, 『역사학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