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진짜 위기는 가족 간 불화?
삼성이라는 공룡기업의 역사 속에 당연히 흑역사는 존재한다. 세상에 위기를 겪지 않고 몸집을 불려온 기업이 몇이나 될까. 삼성은 여러 차례 고비를 넘겨 가며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왔다. 전부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대부분의 한국 기업에게 가장 큰 ‘위기의 역사’는 누가 뭐래도 IMF 경제위기일 테다. 삼성도 마찬가지다. IMF는 삼성에게 지우고 싶은 기억이다.
최도석 삼성전자 경영지원총괄 사장이 모 일간지와 진행한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당시 삼성전자의 자기자본은 5조 8000억 원이었다. 하지만 환율 급등에 따른 환율 조정 3조 2000억 원과 투자자산 중에서 부실 부문을 감안했을 때 당시 삼성전자의 실질적인 자기자본은 제로였다고 한다. 최 전 사장에 따르면 사실상 삼성전자는 97년 IMF 위기 때 “망한 회사”였다.
왜 그렇게까지 위기를 맞았을까?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이래로 유행처럼 번졌던 말이 있다. “국제화” 혹은 “세계화”라는 말이다.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돌파한 한국은 스스로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 자처하며 “세계 속의 한국”을 슬로건으로 내걸기 시작했다. 김영삼 정부는 기세를 몰아 한국을 OECD 가입시키며 한국이 ‘경제 강국’이 되었음을 전 세계에 알렸다. 샴페인을 터트려 버린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대기업들의 경영 방향에도 옮겨붙었다. 삼성도 당시의 국제화 타령에 편승했고, ‘경영의 세계화’를 추진한다며 95년부터 97년까지 3년간 자회사를 40개, 손자회사까지 72개 법인을 삼성전자 아래로 편입시켰다. 하지만 인수 이후 자회사들을 제대로 관리할 인력도 없었고, 결국 자회사들은 아무런 실적도 올리지 못한 채 팽개쳐지는 구조가 되어 버린다. 결과적으로 삼성은 내부적으로 부실이 마구잡이로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삼성은 IMF 경제위기를 극복해낸다. 스스로 부실에 대한 객관적 판단을 내리고 한계 사업들을 과감히 정리해냈다. 그리고 경영 면에서 모든 분야에 걸쳐 원가와 경비를 절감하면서 뼈를 깎는 구조조정에 들어간다. 그 결과 삼성은 국내 기업 중에서 손에 꼽히게 외환 위기를 잘 견뎌낸 기업으로 성장한다. 위기극복을 바탕으로 2002년에는 무역수지 흑자 145억 달러를 달성하는 등 성장 가도를 달리게 된다.
“그래서 대체 삼성의 진짜 위기는 뭐라는 말이야?”
라고 묻고 싶다면 이제부터 시작이다. 삼성의 진짜 위기는 삼성이 대기업으로 성장하던 바로 그때, 정확히는 1966년 9월에 있었던 ‘사카린 밀수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당시 회장이었던 이병철은 명목상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고, 당시 삼성의 큰 돈줄이었던 한국비료공업(현재 롯데정밀화학), 대구대학(현재 영남대학)을 정부에 헌납해야 했다.
하지만 진짜 위기는 따로 있었다. 바로 이 사건으로 촉발된 가족 간의 불화다. 정확히는 삼성과 CJ의 갈등이다. 이건희 전 회장이 자신의 친형 이맹희를 향해 “가문에서 퇴출당한 양반”이라는 표현까지 쓸 정도로 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병철의 셋째 아들 이건희를 중심으로 재편된 새로운 삼성가와 첫째 아들 이맹희를 중심으로 삼성에서 독립해 새롭게 창립한 CJ와의 갈등으로 이어진다. 어쩌다가 그렇게까지 틀어졌을까? 역사에 힌트가 있다.
잠깐, 초기 삼성의 모습을 곱씹어 보자
사실 CJ라는 회사의 시작은 앞서 살펴본 삼성과 뿌리가 같다. 어쩌면 당연한 말이다. 애초에 CJ는 삼성이 쥐고 있던 사업군 중 일부를 물려받은 기업이니까 말이다. 삼성은 한국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이병철이 경상남도 부산시 전포동에서 설립한 설탕공장을 중요한 성장동력으로 삼아 몸집을 불려왔다.
당시 한국의 중추적인 산업이었던 삼백산업(제분, 제당, 면방직 산업)은 삼성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분야였다. 게다가 삼성의 설탕공장에서 국내 최초로 한국산 설탕을 만들게 되고, 이후 높은 매출을 올리게 된다. 초기 삼성과 설탕은 그만큼 끈끈했다. 이때 생산된 설탕의 상표가 바로 그 유명한 백설이다. 더욱 상징적인 것은 이 시기 삼성에서 설립한 ‘제일제당 공장’이 바로 삼성이 제조업 분야에 진출한 첫 사례였다. 그러니까 삼성이 진정한 제조업체로서 거듭나게 되는 시발점을 설탕, 더 정확히는 제일제당이 주도했던 것이다.
이후 삼성 아래 제일제당은 백설이라는 브랜드를 확장해 나가면서 설탕뿐만 아니라 밀가루까지 확장해 주력상품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한때 ‘미풍’이라는 조미료를 만들어 당시 조미료 업계의 원탑이었던 ‘미원’에 도전하기도 했지만,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제일제당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 있다면 바로 ‘미풍’일 테다. 오죽했으면 이병철 회장이 “세상에 내 맘대로 안되는 것이 세 가지 있는데, 자식과 골프, 미풍”이라는 말까지 했을 정도였다.
국무총리가 사람 똥물을 뒤집어쓰게 된 ‘사카린 밀수사건’
아무튼, CJ의 모태가 되었던 제일제당은 그렇게 출발했다. 그랬던 삼성 속 제일제당이 별도의 회사가 되어 서로 원수가 되어 버린 사건은 ‘사카린 밀수사건’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966년 5월 24일, 당시 삼성그룹의 계열사였던 한국비료공업(현 롯데정밀화학)이 일본 미쓰이 그룹과 공모해서 사카린 2,259포대(약 55톤)를 ‘건설 자재’로 명의를 변경해 한국으로 들여와 판매하려다 걸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건을 더 파보니 사카린뿐만 아니라 당시 밀수를 통해 현금화하기 쉬웠던 일본제 냉장고와 밥솥까지 몰래 들여오고 있었다. 대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던 삼성이 연일 언론을 통해 마치 “잡상인”으로 비춰지는 치욕의 나날이었다. 애초에 경향신문이 이 사건을 폭로하면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다른 언론사들도 연일 삼성의 밀수사건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언론의 끊임없는 비판으로 민심이 들끓자 부산 세관은 사카린 1,059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000만 원을 부과하는 것으로 사건을 덮으려 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그렇게 간단한 사건이 아니었다. 이미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돌았고, 중앙정보부의 비호하에 정권에 비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은밀한 사업이었다는 소문으로까지 확대되고 있었다. 삼성이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사카린을 팔아 비자금을 조성하고, 그 비자금 중 일부를 중앙정보부, 더 정확히는 정치자금으로 상납했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정확한 사실관계를 떠나 이 소문을 접한 정치권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승만 정권 시기부터 문제로 지적된 ‘정경유착’이 군사정권에서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에 야당이었던 민중당 등은 물론이고 여당인 민주공화당까지 정권에 대한 비판 수위를 높여갔다. 하지만 당시 박정희 정권에서는 삼성을 감쌌고, 이에 반발하며 야당은 “관련자 전원 구속” 그리고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며 초강수를 두게 된다.
그러던 1966년 9월 22일, 이 사건의 클라이막스를 찍은 사건이 터지게 된다.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김두한이 ‘사카린 밀수사건’에 대한 대정부 질의를 하다가 갑자기 정일권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인사들에게 “똥이나 처먹어, 이 새끼들아!”라고 소리 지르며 인분을 뿌려 버린 것이다. 정말이다. 김두한이 국회에 사람 똥물을 투척했다. 삼성이 저지른 밀수사건으로 국무총리가 똥물을 뒤집어쓰게 되자, 정일권 총리를 비롯한 내각은 총사퇴를 선언했고, 김두한도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곧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다.
사건은 더욱 커졌고, 결국 삼성은 어떤 형태로든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이병철 삼성 회장은 결국 한국비료공업과 대구대학을 정부에 헌납했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는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둘째였던 이창희가 사카린 밀수의 책임을 지고 1년간 옥살이를 하게 된다. 해방 후 성장을 거듭해오던 삼성에게는 엄청난 치욕이었고, 이병철 개인으로서도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입게 된 사건이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다음에 벌어진다. 어떤 문제였냐고? 그 내용은 다음 화(클릭)에서 알아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