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철, 아니 이병철의 시작
화제의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이 화제 속에서 막을 내렸습니다. 오랜만에 20%가 넘는 높은 시청률을 보인 드라마였기에 배우들의 대사 하나하나가 화제였던 드라마였는데요. 무엇보다 진양철 역을 맡은 이성민 배우의 연기력이 새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 믿고 쓰는 배우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 드라마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대체 순양은 어떤 회사인가?”, “그럼 진양철은 또 누구를 모델로 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졌던 드라마였는데요. 극 초반 “설마, JTBC에서 삼성을?”이라는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스토리가 전개될수록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갔습니다. 진한 경상도 사투리에, 특유의 안경, 붓글씨를 쓰는 모습에서부터 예술품 수집까지. 거기에 초밥과 관련된 일화까지 드라마에 등장하며 “진양철은 곧 이병철”임을 대놓고 보여줬습니다. 그럼 대체 화제의 인물 진양철, 아니 이병철 회장과 그가 창업한 삼성은 어떤 기업일까요?
이병철 회장은 1910년생으로 경상남도 의령 출신입니다. 당시 그의 집안은 ‘천석꾼’이라고 불릴 정도로 의령과 진주지역에서는 알아주는 엄청난 거부였습니다. 1922년 지수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그해 9월 서울로 유학 가서 수송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학합니다. 이후 중동학교 속성과 1학년에 입학했고, 중학부에 들어가 학업을 이어가게 됩니다. 이후 1929년 박두을과 혼인해 곧 다음 해인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학과에 입학합니다. 하지만 곧 병에 걸려 학업을 중단하고 1934년 귀국하게 됩니다.
중간에 학업을 중단했지만, 부유한 집안 사정으로 좋은 환경에서 학업을 이어온 이병철 회장이었기에 당시로써는 압도적인 학력을 자랑했죠. 그렇다고 이병철 회장이 바로 사업을 시작해 엄청난 성공을 거뒀냐면, 그건 또 아니었습니다. 몇 년간은 부잣집 도련님 놀이를 하며 아버지에게 용돈 받아 쓰는 한량 노릇을 합니다. 여느 한량들처럼 친구들과 도박에 빠져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나의 26세 때 잠들어 있는 네 명의 자녀가 자는 모습을 보고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싶은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정말 그날 스쳐간 잠깐의 생각이 그의 인생을 순식간에 바꾸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순간 이병철 회장은 사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렇게 부친에게 지원받은 쌀 300석분의 토지를 종잣돈으로 1936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창업하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본격적인 대륙침략으로 인해 돈 줄이 마르게 되었고, 첫 사업은 보기 좋게 망하게 됩니다. 사실 김해에서 ‘농지 투기’를 했다가 망했던 것도 한몫을 했죠. 그리고 얼마 뒤인 1938년 3월, 이병철은 대구부 수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인교동)에 삼성상회(三星商會)를 개업하면서 운명의 삼성그룹이 시작됩니다. 당시 자본금이 30,000원이었다고 하는데, 당시 평균 임금 약 15원이었음을 생각하면 시작부터 집안의 빵빵한 지원으로 회사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지요.
이후 1941년 회사를 주식회사 형태로 개편했고, 청과류나 어물을 공급받아 판매하는 도·소매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수출까지 하면서 물건을 중국에 팔기도 했습니다. “역시 삼성이군”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이 시기까지 삼성은 우리가 알고 있는 굴지의 기업은 아니었습니다. 그래 봐야 아직은 대구에서 알아주는 젊은 사업가의 기업 정도였을까요?
아무튼, 조금씩 사업수완을 늘려가던 이병철 회장은 벌어들인 돈을 모두 공장 설비 투자에 쏟기 시작했는데요. 당시 이병철 일가는 공장 귀퉁이에서 새우잠을 잤다고 회고했을 정도로 공장 상태가 열악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1945년 한국은 해방을 맞았고, 삼성의 모습도 조금씩 변화, 아니 성장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해방 후 1947년, 대구를 떠나 경성으로 상경한 이병철 회장은 삼성물산공사를 창업하고 무역업에 본격적으로 손을 뻗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한국전쟁 중에도 그의 사업을 향한 열정은 끝이 없었는데요. 1951년, 전쟁으로 무너졌던 삼성물산을 부산에서 재건해 무역업에 다시 뛰어듭니다. 그리고 1953년에는 제조업에 투자하기 시작했고, 전후에는 국가를 지불보증인으로 세워 차관을 받아 점차 대기업으로 성장하기에 이르렀죠.
이승만 정권 시기 이병철 회장은 사업에 박차를 가합니다. 1953년에 제일제당, 1954년에 제일모직을 설립하고 제조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죠. 바로 이 제조업 중심의 초기 사업들이 모두 현재 CJ그룹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이승만 정권에서는 ‘삼백산업’(면, 설탕, 밀가루)에 집중적인 지원을 해주고 있었는데요. 삼성이 딱 그에 맞는 산업으로 인수확장을 시도했고, 급격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후 동방생명, 신세계백화점, 안국화재보험, 전주제지 등을 인수했고, 사업 영역을 점점 크게 확대해서 중앙개발, 고려병원 등을 인수해 그야말로 대기업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병철 회장과 삼성의 성장은 군사정권 시기에도 이어졌습니다. 1964년 한국비료를 인수했고, 이후 동양라디오, 텔레비전 동양방송을 설립해 방송사업에도 진출하게 되는데요. 현재 JTBC의 모태가 된 바로 그 방송국이죠. 1965년 중앙일보까지 창설해 언론사에도 진출하는데요. 이후 중앙일보는 이병철의 삼남이었던 이건희의 처가에서 운영하게 됩니다.
아무래도 요즘은 삼성이라고 하면 ‘삼성전자’가 먼저 떠오르는데요. 삼성은 1968년 본격적으로 전자산업 진출을 선언하면서 수원에 공단부지를 매입하게 되는데, 그렇게 삼성전자와 삼성-SANYO전기를 창업하게 됩니다. 이후에도 삼성의 확장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1973년에는 제일합섬을, 이듬해에는 삼성석유화학을 세우며 화학 분야로 손을 뻗었죠.
그리고 운명의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해 반도체산업에 처음 손을 뻗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77년 삼성종합건설을 세워 건설업에도 손을 뻗었고, 1979년에 삼남이었던 이건희가 부회장 자리에 오르며 2세 경영체제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소니시대’에서 ‘삼성시대’로, 삼성의 본격 발전사
이병철 회장이 창업하고,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삼성은 그렇게 국내에서 유력한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성공합니다. 삼성이 성장하는 모습만 이야기하다 보니 처음부터 삼성이 우리가 바라보는 지금처럼 세계적인 기업이었나 싶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히 초기의 삼성전자는 속된말로 허접하기 그지없는 회사였는데요. 최근에는 삼성이 많이 앞서있다고 하지만 일본의 소니와는 비교했을 때 ‘라이벌’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급이 떨어지는 회사였습니다.
삼성전자가 초기에 만들던 제품은 백색가전과 AV 기기였는데, 당시에는 독자적으로 제품을 완성할 수도 없던 회사였습니다.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여 반도체 사업에 진출했지만, 당연히 기술력은 현저히 떨어졌죠. 그러나 이후 1980년 한국전자통신을 인수하고, 1983년 2월 DRAM 사업에 진출한다는 ‘동경 선언’을 발표하면서부터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산업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고착화되어버린 어마어마한 ‘해외의존도’ 때문이었는데요. 특히 1973년 제1차 석유 파동은 전 국가적 위기로 이어졌고, 삼성도 예외일 수 없었죠. 석유 파동으로 1973년 물가상승률이 한 해 만에 3.5%에서 24.8%로 상승했고, 성장률은 12.3%에서 7.4%로 떨어진 데다가 무역수지 적자는 10억 달러에서 24억 달러로 치솟았으니 엄청난 충격이었던 겁니다. 1979년 제2차 석유 파동은 더욱 심각했습니다. 1980년의 실질성장률은 경제개발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2.1%)를 기록했고, 물가상승률은 무려 28.7%에 달했습니다.
삼성전자는 바로 이 파동을 겪으며 석유 가격에 좌지우지되는 기업의 수익구조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체적인 반도체 개발이 필수적이라고 바라봤고, 이병철 회장의 막대한 투자가 감행되었던 겁니다.
이후 1983년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 64K DRAM을 개발에 성공했으며, 이때의 메모리 반도체 부문 투자의 성과가 1990년대로 이어지면서 지금의 삼성전자가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1990년대, 삼성전자가 소니를 따라 잡았느냐하면, 그건 또 아니었습니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안에서 재계 상위권에 속하는 대기업 중 하나였을 뿐, 소니는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2000년대 들어서 삼성전자의 목표는 경쟁사인 일본, 그중에서도 소니를 따라잡는 것이 됩니다. 특히 IMF 외환위기 시기 삼성은 과감한 구조조정으로 ‘효율적인 기업’으로 변화했고, 2000년 국내 기업 시가총액 1위를 차지하면서 성장이 가속화되면서 독보적인 한국의 1위 기업이 됩니다. 이제 일본의 기업들과 제대로 승부를 볼 수 있었던 시점이 찾아온 겁니다.
그렇게 성장을 거듭한 삼성은 2005년 기업의 가치평가를 하는 ‘인터브랜드’에 의해 국제적으로 라이벌 관계였던 소니를 제치고 가장 인기있는 전자제품 브랜드로 등극합니다. 2007년에는 모토로라를 제치고 세계 2위의 휴대폰 제조 회사로 성장했으며, 같은 해 말에 최초로 매출 1,000억 달러를 달성했죠. 이후 2009년 매출 100조 원, 영업이익 10조 원을 돌파했고, 매출 기준으로 IT회사 중 세계에서 가장 순이익이 좋은 회사가 됩니다.
운명의 2012년 전체 매출액 200조 원 돌파하면서 일본의 전자제품 회사들을 대부분 앞지르게 됩니다. 특히 소니와의 대결에서도 점점 우위를 차지하기 시작한 시점도 이때부터였는데요.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이 스마트폰과 반도체였죠. 자체생산하는 반도체로 만드는 삼성전자의 핸드폰이 결정적인 성장의 역할을 했던 겁니다. 반면 소니는 여전히 가전제품에서 수익을 얻는 구조였는데요. 텔레비전이나 카메라, 게임기 등 소니가 만드는 모든 제품은 삼성이 만드는 스마트폰 안에 다 들어있었다는 것이 결정적이었죠.
그만큼 스마트폰은 삼성전자에게 가장 중요한 사업이 되었습니다. 삼성전자의 전체 영업이익의 70% 이상을 차지할 정도죠. 덕분에 삼성전자는 아시아 시장에서 브랜드 영향력이 어마어마한 기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도요타, 중국 하이얼, 텐센트 다음으로 높은 영향력이죠. 일본의 소니와 혼다는 각각 7, 8위에 그쳤습니다.
아시아를 벗어나면 가장 큰 라이벌은 단연 애플인데요. 두 기업 중 어떤 기업이 앞서고 있는지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특허 영향력’만 놓고 따지면 삼성이 애플을 제치고 가장 높은 기업이라고 할 수 있죠. 2021년 말 기준으로 삼성전자의 특허는 11만127개며, 특허자산지수는 23만8920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애플은 6만9964개라고 하니, 3배 가까운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삼성의 진정한 뒷배는?
“너무 삼성을 치켜세워주는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겠습니다. 맞습니다. 삼성은 사실 흠도 많은 회사입니다. 삼성이라는 회사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경유착이라는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국 경제개발의 전환점은 5.16쿠데타였습니다. 쿠데타 직후 군사정권은 ’부정부패 척결’을 발표하면서 재계 12위까지의 재벌 회장들을 부정 축재자 명단에 올려버리고 구속해 버리죠.
바로 이때 이병철 회장은 일본에 머물고 있었는데요. 상황의 심각성을 바라보며 귀국을 미루면서 군사정권과 협상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이병철 회장은 6월 27일 귀국하자마자 박정희와 면담을 나누게 됩니다. 이때 이병철 회장은 기업인들을 가둬 두면 경제활동이 위축될 수 있음을 지적하며 기업인들이 경제개발을 위해 적극 투자 활동에 나설 수 있게 해달라고 조언했다고 하죠.
그렇게 박정희는 부정축재 처리위원회를 통해 재계 인사들에게 재산 목록을 제출받고, 일부 기업인들에게는 재산을 헌납받는 것으로 약속을 받고 기업인들을 석방하게 됩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기업과의 단단한 유착 관계를 형성하는 속에서 경제개발을 단행할 수 있었죠.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까요. 이 시기, 그러니까 한국 경제성장 과정에서 함께 성장한 기업, 특히 특히 기업의 오너들은 사실상 ‘정치적인 기업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학연, 지연 등의 연고주의 고리를 통해 정치권에 줄을 대고 각종 특혜를 독식하게 되죠.
사실 이런 구조는 이승만 정권 시기부터 내려오는 뿌리 깊은 문제였습니다.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었죠. 한국전쟁이 끝난 후 전쟁 구호물자와 구호자금은 연고주의에 기반해 특정 기업들에 독점되었고, 그들이 만든 각종 협회가 정치권과 끈끈하게 연결되어 특혜를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던 겁니다. 대표적인 협회가 바로 제당협회, 방직협회, 제분공업협회, 건설협회였는데, 대부분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도 관여된 협회였죠. 이병철은 협회에서 받은 자원과 자금을 이용해 제일제당, 제일모직, 조선양조 등의 회사를 1950년대에 설립하고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박정희 정권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은행 등의 금융을 통해 재벌 창업주들을 통제했는데요. 박정희 정권은 금융 특혜, 조세 감면, 차관 배정, 부실기업 인수 특혜 등을 소수의 선택된 재벌들에게만 제공했고, 삼성은 이 과정에도 모든 특혜를 누리며 성장하게 됩니다. 그렇게 삼성은 이른바 ‘재벌’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런 ‘삼성’도 망할 뻔한 적이 있다고?
삼성도 망할 뻔 한 적이 있습니다. 특히 IMF가 가장 큰 위기였는데요. 최도석 삼성전자 경영지원총괄 사장에 따르면 당시 삼성전자의 자기자본은 5조 8000억 원이었고, 환율 급등에 따른 환율 조정 3조 2000억 원과 투자자산 중 부실 부문을 감안했을 때 실질적인 자기자본은 제로였다고 전해집니다. 사실상 삼성전자는 97년 결산 당시 망한 회사였다고 회고했죠.
그도 그럴 것이 삼성은 당시 ‘국제화 열기’에 편승해 세계화를 추진한답시고 1995년부터 97년까지 3년간 자회사를 40개까지 늘리고, 손자회사까지 72개 법인을 갑작스럽게 삼성전자 아래로 편입시켜 버렸습니다. 무턱대고 인수를 했지만, 인력이 없어 제대로 된 관리를 할 수 없게 되어 버렸고, 결국 인수 후 자회사들은 내팽개치는 구조가 되어 버렸던 거죠. 결과적으로 부실이 마구잡이로 늘어났던 겁니다. 이후 파격적인 구조조정으로 되살아났지만, 이때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다면 지금의 삼성그룹은 어쩌면 대우그룹의 꼴이 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보다 훨씬 큰 위기는 삼성이 대기업으로 성장하던 초기, 1966년 9월에 있었던 ‘사카린 밀수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이병철 회장이 명목상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고, 당시 한국비료공업(현재 롯데정밀화학), 대구대학(현재 영남대학)을 정부에 헌납해야 했을 정도였는데요. 더욱이 이 사건으로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가 삼성 경영에서 물러났고, 차남이었던 이창희는 감옥에 가야 했던 삼성가 역사상 치욕의 시간이었죠. 덕분에 삼남이었던 이건희가 삼성그룹의 오너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어떤 사건이었냐고요? 그 이야기는 다음 콘텐츠에서 집중적으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