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파동과 세계경제의 변화

2차대전 이후의 세계는 이전의 제국주의적 착취에서 어느 정도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국제적인 분업체계가 형성되면서 주권을 지닌 세계 각국이 각자의 역할을 분담해 자원을 제공하고, 자원을 가공해 부품을 만들고, 부품을 조립해 제품을 만들며, 제품을 소비하며, 이를 위한 투자를 수행했던 것이에요. 물론 이러한 분업이 완전히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힘들지만요.

전후경제에서 가장 중요했던 자원은 물론 석유였습니다. 석유는 생활필수품이 된 자동차의 연료였을 뿐만 아니라, 플라스틱이나 섬유를 가공하는 원료이기도 했죠. 석유의 생산은 상당부분 중동의 산유국들에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정치적, 군사적 개입을 통해 자국 석유회사들의 이해가 중동에서 관철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산유국들은 석유의 생산에 대한 통제권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키울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석유수출국기구(Organization of the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OPEC)의 설립도 그중 하나였어요. 석유수출국기구는 국제적인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들의 전쟁에서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자,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석유의 생산을 줄여 가격을 기존의 네 배로 올려버렸던 것이죠. 이 사건은 1970년대 석유파동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전에도 서구 중심국의 성장률은 둔화되는 추세를 보였지만, 석유파동 이후에는 그 추세가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물가가 크게 오르면서 소비가 위축되고 그 결과 실업이 늘어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죠. 결국 중심부 국가들은 국제 분업체계를 개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더 낮은 임금으로 상품을 생산하는 국가들에서의 수입을 통해 물가를 안정시켜야 했던 거예요. 이러한 필요는 자본의 이동으로 나타났는데요. 1960년 해외에 투자된 미국 자산은 492억 달러에 불과했지만, 1980년에는 5790억 달러로 늘어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중심부 국가들의 투자를 유치해 신흥공업으로 부상한 국가가 브라질, 멕시코, 싱가포르, 홍콩, 대만, 그리고 한국이었죠. 이들은 섬유, 피복, 철강, 선박 등 공업 상품의 생산과 수출을 맡게 되었고, 중심부 국가들은 이윤율이 높은 하이테크 산업과 금융-서비스업을 위주로 자국 산업을 재편해갔습니다.

세계경제의 변화로 브레턴우즈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졌습니다. 국제수지가 악화되는 한편 베트남 전쟁에 소요된 지출을 감당하지 못한 미국은 달러에 연동된 고정환율제를 포기했습니다. 세계는 다시 변동환율제로 돌아가게 되었죠. 다극 체제로의 변화가 시작되었던 거예요. 석유수출국기구뿐만 아니라 유럽경제공동체 등 미국의 입김에서 벗어난 경제기구들이 힘을 더욱 키웠습니다. 또 중국이 개방을 하면서 세계경제 체제로 진입하기 시작했죠.

이러한 변화 속에서 미국과 영국에서는 국가의 개입과 계획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어차피 조정이 불가능하다면 아예 다시 시장에 맡기자는 것이었죠.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영국의 마거릿 대처 등 신보수주의를 대변하는 정치인들이 1980년대를 주도했습니다. 2차대전 이후 늘어난 국가의 역할을 비판해왔던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19세기 자유방임 국가로의 회귀가 가능하지는 않았어요. 규제와 개입의 철회는 선택적으로 이루어졌고, 이는 주로 기업가들을 위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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