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합리의 발견: 17세기 과학혁명

‘눈먼 시계공’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오늘날 과학자들이 창조설을 비판할 때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죠. 자연을 정말로 신이 설계했다면 그 신은 눈이 멀어 있을 거라는 일종의 비꼼입니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종교와 과학을 엄밀하게 분리합니다. 그런데 가끔은 이러한 확신이 과학의 역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져옵니다. 예컨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등 당대의 자연철학자들이 기독교 교회에 과학과 이성의 이름으로 저항했다는 설명은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신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다만 신이 성서 말고도 다른 책을 썼다고 생각했어요. 바로 ‘자연’이었죠.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과 종교개혁가들이 저마다의 원전으로 돌아가려 했듯이 자연철학자들도 ‘자연=책’을 직접 읽으려 했습니다.

중세 말기,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해석의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종교개혁은 가톨릭 교회 중심의 일원적인 해석에서 벗어난 종교적 사유를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또한, 계속된 전쟁과 사상적 혼란은 안정성에 대한 요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데카르트가 모든 것을 회의함으로써 확실한 하나를 찾으려했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겁니다. 여하튼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16, 17세기의 자연철학자들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방식으로 자연을 이해함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사상 체계를 만들고 싶어 했어요. 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았던 이들은 자연이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여 있다고 믿었고, 동시에 자연의 대상물들이 신이 만들어낸 일종의 기계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이 정교한 시계공처럼 자연을 설계했다는 표현도 이때부터 보편화되었죠.

그렇다면 자연이라는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일단 자연을 보아야겠죠. 하지만 어떻게?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인이었던 베이컨은 자연을 잘 관찰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우선 남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본 것만이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이 공통의 기준에 따라 정리되어야 했습니다. 나아가 이 작업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인간은 신이 자연에 남긴 완전한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지만 훈련된 이성이라는 힘을 이용할 수는 있었죠. 갈릴레오의 표현처럼 감각의 불완전함을 세련된 이성으로 보완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베이컨은 사물 하나하나를 전문적이고 엄밀하게 관찰하는 귀납적인 연구방법을 강조했습니다.

영국의 자연철학자 보일은 베이컨의 아이디어를 더욱 발전시키고 실천했습니다. 1660년 설립된 런던 왕립학회는 자연 연구의 기준을 세우고 지식을 공유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초기 왕립학회를 주도했던 보일은 ‘실험’이라는 개념을 현실화시키면서 과학적 지식 생산에 이상적인 환경을 마련했습니다. 관찰의 객관성을 공인하고 공유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이었죠. 보일 이전에도 실험이라는 개념은 있었습니다. 갈릴레오가 피사의 탑에서 다른 무게의 공 두 개를 떨어뜨렸던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보일 이전의 실험은 ‘사고실험’과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재연가능성과 조건통제를 원칙으로 하는 전문적인 실험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될 거야” 정도의 느낌이었죠. 사실 갈릴레오도 저 실험을 직접 한 적이 없었습니다.

뉴턴은 보일과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베이컨을 계승했습니다. 그는 실험이 필요한 것은 맞지만 객관적 사실의 수집을 넘어 자명한 인과법칙을 규명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신이 자연을 만들어놓고 손을 뗀 것이 아니라 매순간 개입하고 있다는 뉴턴의 신학적 입장과도 이어져 있었죠. 뉴턴에게 ‘만유인력’이란 바로 신의 항시적 개입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F=ma’라는 수학 공식으로 표현되었죠. 이처럼 뉴턴은 신이 남긴 자연이라는 책이 수학적 언어로 쓰여 있다는 자연철학자들의 믿음을 완성시킨 인물이었습니다.

같은 시기 발전한 근대 국가는 과학의 형성과 발전을 지지하고 지원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새로운 지식은 지배계급의 자기치장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예컨대 갈릴레오가 목성의 위성을 발견하고 거기에 자신의 후원자 이름을 따 메디치 성(星)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일은 마치 메디치 가문이 천체, 즉 신에 가까운 권위를 지니게 해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자연철학이 유럽의 귀족과 신사 계층의 교양문화로 자리 잡으면서 이에 대한 지원이 지배자의 사회적 위상을 나타내주기도 했죠. 군사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국가는 자연철학의 실용적 효과를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수리과학이나 화학에 대한 지원이 더 강력한 요새를 짓거나 더 좋은 화약무기를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던 거죠. 17세기중반에 등장한 각국의 왕립학회들은 이러한 흐름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17세기 과학혁명의 의의는 분명하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 성격이 과장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뉴턴의 책 <프린키피아>를 읽은 사람은 아마 당시 유럽에서 100명도 채 안 되었고 그것을 이해한 사람은 그보다도 적었을 겁니다. 그들이 종교의 권위에 맞서 이성의 힘을 주창했다고 말하기에도 무리가 있죠. 하지만 17세기의 사상적 혁신은 근대인들의 사유를 형성하는 데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볼 프랑스 계몽주의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볼테르가 유명한 ‘뉴턴 마니아’였다는 사실은 꽤 의미심장하죠.

Newsletter
디지털 시대, 새로운 정보를 받아보세요!
작가와 대화를 시작하세요
1 이달에 읽은
무료 콘텐츠의 수

조금 더 '깊이 읽는' 지식채널 언리드북, 지금 가입하고 인문∙예술∙과학 분야 전문가의 깊이 있는 '인사이트'를 무제한으로 만나보세요!

구독하시면 갯수 제한 없이 읽으실 수 있어요!

Powered by Bluedot, Partner of Mediasphere
닫기
Sh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