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저는 ‘법과정치’ 과목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교과서에 나오는 무수한 사상가들의 원전을 직접 읽어볼 생각은 못했습니다. 수능 위주의 입시에서 원전을 읽는 건 큰 도움이 안 됐죠. 대학에 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나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같은 책을 처음으로 읽으면서 교과서에 정리되어 있는 몇 줄로 이들의 사상을 이해했다고 믿었던 게 약간 부끄러워졌던 것 같습니다.
중세의 유럽인들은 한국의 고등학생들보다 훨씬 더 원전에 접근하기 힘들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삶을 규정했던 성경조차 직접 읽어본 적이 없었죠. 아주 소수의 성직자들만이 원전을 읽었고 엄청나게 긴 주석을 달아두었습니다. 그 주석들이 곧 교과서가 됐고 모두가 그것만 읽었어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도 극히 소수였지만요. 하지만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시기에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원전을 직접 읽고 다르게 생각해보려 했던 것이죠. 고전시대의 저작과 성경의 원전을 정확한 방식으로 다시 읽으면서,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과 종교개혁가들은 스콜라 철학과 가톨릭 교회라는 중세의 지적 권위에 도전했습니다.
이들은 왜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려 했을까요?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것은 이탈리아의 상층시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지중해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도시의 세속적 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이었죠. 하지만 스콜라 철학은 성직자들의 철학이었고 세속의 삶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도시인들은 기독교인으로서 신을 사랑했지만, 그렇다고 참된 진리만을 좇아 고행하는 삶만을 살고 싶어 하지는 않았어요. 더 현실적인 지식, 이를테면 법률, 공증, 서기와 같은 세속적 지식을 원했던 것이죠. 이러한 흐름을 대표하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입니다. <군주론>은 정치지도자는 도덕과 교리가 아니라 정치적 역량과 기술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치를 종교로부터 독립시켰습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원전에서 새로운 지적 권위를 찾으려 했습니다. 마키아벨리 역시 로마의 공화주의를 깊게 연구했어요. 하지만 그들이 단순히 고대로 돌아가자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고대의 텍스트를 객관적으로 읽음으로써 자신이 살고 있던 세계를 다시 사유하려 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겁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로렌초 발라의 ‘콘스탄티누스 기진장’ 비판입니다. 중세 교회는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교황의 세속적 통치권을 인정했다는 내용의 기진장을 보관하고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세속의 일에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시대의 문헌학에 조예가 깊었던 발라가 확인해보니 기진장에서 사용한 어휘들이 콘스탄티누스가 살았던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던 겁니다. 발라는 이런 이유로 기진장이 위조문서라고 주장했습니다.
르네상스 운동은 이탈리아에서 멈추지 않고 북서유럽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이 편집한 고전 문헌이나 저작들이 이 시기에 보편화된 활판 인쇄술 덕분에 빠르게 유통된 탓이었죠. 하지만 북서유럽에는 세속적 생활을 영위하는 시민계층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원전으로 돌아가자’는 르네상스의 정신은 성경연구자들에 의해 계승됩니다. 이들은 성경의 원전을 연구해 초기 기독교의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당시에 신약성경의 원전인 그리스어본이 발견되면서 교회가 그때까지 사용하던 라틴어 성경의 권위가 흔들리고 있기도 했죠. 이에 네덜란드 출신의 신학자이자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뮈스는 그리스어 원본과 자신의 라틴어 번역본을 함께 수록한 신약성경을 출판했습니다. 성경을 객관적으로 탐구할 수 있게 했던 것이죠. 당대의 세속적 문제들을 깊이 있게 통찰한 <유토피아>의 저자 토머스 모어도 영국의 인문주의자였습니다.
마르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은 이러한 변화에 배경을 두고 있습니다. 루터가 성경 원전으로 돌아가자며 출간했던 독일어 성경은 일반대중을 위해 집필된 최초의 성경이기도 했지만, 에라스뮈스의 그리스어-라틴어 대역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루터는 교회가 사용하던 라틴어 성경이 아니라 인문주의자들의 성경을 사용했던 것이죠. 르네상스와 함께 발전했던 인쇄술 역시 루터의 팜플릿과 논고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종교개혁은 중세 교회의 부패에 직접적으로 대항했습니다. 당시 독일은 프랑스나 영국처럼 강한 왕권이 부재했기 때문에 교회의 세속적 지배가 가장 강하게 나타났던 지역이었습니다. 주교들이 독일 민중의 돈을 쓸어모아 로마의 교황청으로 보내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어요. 종교개혁의 도화선으로 알려진 면벌부 역시 교황 레오 10세의 성 베드로 성당 건립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독일에서 대대적으로 판매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반쯤은 강요된 판매였죠. 면벌부에 대한 반박문으로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은 교회의 세속적 지배에 대한 저항으로도 비추어졌어요. 그렇기 때문에 ‘만인사제주의’나 ‘기독교인의 자유’ 등과 같은 루터의 사상에 많은 독일 농민들이 공감했고 일종의 사회혁명으로서 종교개혁이 들불처럼 퍼져나갔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농민들의 바람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루터 본인이 독일의 제후들의 편에 섰고, 교회를 대신해 지역의 영주들이 독일의 농민들을 지배했기 때문이었죠. 16세기 중반의 종교전쟁을 매듭지었던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을 한 마디로 요약한 표현인 ‘지역을 통치하는 자가 종교를 결정한다’는 세속 통치자들의 강화된 권력을 보여줍니다.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종교전쟁은 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실추시켰습니다. 각국의 군주들은 오랜 전쟁이 가져온 혼란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통치권을 강화했고 가족, 교육제도, 빈민구호 등 교회가 수행해왔던 역할을 세속적 기관으로 이전시켰습니다. 결국 종교개혁은 근대 국가의 출현에도 이바지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