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종말?

지금까지 우리는 서구 사회에서 ‘근대’라는 기획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탄생했고 어떠한 과실과 어두움을 남겼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에 기대어 자유와 평등을 확대시키고 동시에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오겠다는, 실로 야심찬 계획이었죠. 이 계획은 주로 국민국가에 의해 추진되었어요. 그들에게는 몇 가지 선택지가 있었죠. 자본주의 국가들은 시장의 힘을, 사회주의 국가들은 계획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믿었죠.

하지만 이 두 방식은 시간이 지나며 적절히 혼합되었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삶을 국가가 책임져주는 북유럽 국가들을 완전한 자본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시장에서 엄청난 경쟁이 벌어지는 중국은 완전한 사회주의 국가일까요? 현대 국가 대부분은 시장과 계획이 적절히 혼합된 정치경제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화가 가능했던 이유는 자유주의 사회이든 사회주의 사회이든 같은 목표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민국가의 힘을 기반으로 사회를 조직하고, 기술혁신을 통해 생산력을 늘리며, 성장의 과실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게 바로 그것이었죠. 물론 무엇이 공평한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많이 달랐지만요. 냉전은 자주 참혹한 결과를 낳았어요. 그래도 미국과 소련의 경쟁을 어쨌든 어느 체제가 더 ‘진보’적인가를 두고 이뤄진 경쟁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1991년 소련이 무너지며 이 오랜 경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소련은 국민총생산의 20% 이상을 미국과의 군비 경쟁에 쏟아 부었고, 자유주의 국가들만큼 효율적인 국제 분업체제를 수립하는 데 실패했어요. 국가 기구의 경직성을 보완하는 데도 미숙했고요. 결국 4만여 개의 핵무기만을 남긴 채 내부에서부터 무너졌습니다.

동부권이 붕괴하자 한 학자는 ‘역사의 종말’을 이야기했습니다. 근대 이후 인간이 만들어낸 정치체제의 최종 형태가 결정되었다는 말이었어요.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함으로써 자유주의 체제의 국가 형태를 위협할 더 이상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이었죠. 이는 역사의 ‘진보’가 드디어 완성되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냉전이 끝나고도 이상적인 세계가 도래하지는 않았어요.

냉전 이후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 체제에는 동부권 국가들과 신흥공업국이 포섭되었습니다. 1995년 설립된 세계무역기구는 가트 협정 이상의 자유무역을 추구했어요. 기존에는 어느 정도 보호주의가 용인되었던 농산물 시장과 자본 시장까지 완전히 개방할 것이 요구되었죠. 세계 각국이 경쟁할 수 있는 판이 깔리자 여러 국가들이 자국의 이익을 늘리기 위해 경쟁했습니다. 세계경제는 다시 성장했고 어떤 나라는 지위가 상승하고 어떤 나라는 하락하는 게 반복되었어요.

자유무역은 세계 각 국가 간의 공정한 경쟁과 갈등의 방지를 위해 고안되었습니다만, 완벽하지는 못했습니다. 특정 국가 위주의 경제협력, 자유무역협정, 경제블록화 등은 여전히 변수와 갈등을 만들어내고 있어요. 군사적 위협도 끊이지 않고 있죠. 또한 세계무역의 확대는 각국 내부 정치의 우경화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임금향상이나 복지의 확대를 위한 노력이 생산비용을 낮추어 세계시장에서 ‘국가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구호에 묻히게 된 것이죠. 기술혁신은 계속 이어져 컴퓨터 제품과 스마트폰 같은 모바일 기기가 보편화되었지만, 실질 임금은 많은 국가에서 제자리에 머무르게 되었어요. 반면, 자본소득은 크게 증가했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경제의 연결성이 늘어나고 자본의 이동에 대한 제약이 낮아지면서 세계적 차원의 경제위기가 더 심각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부동산 시장에서 시작된 2008 금융위기도 그중 하나였죠.

Photo by Alejandro Luengo / Unsplash

우리는 계몽주의 이후 서구사회에서 솟아났던 발전과 진보의 이념이 상당히 빛을 바랜 시대에 태어나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역사가 종말을 맞이한 것은 아니겠지요. 고쳐 쓸 것이 있을 거고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것들도 있을 겁니다. 서구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역사,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 전체의 역사를 생각해볼 수도 있을 거고요. 하지만 그럴수록 서구가 걸어온 길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평가하는 일이 중요할 것 같아요. 지금까지의 강의가 서양사를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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