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그러니까 철학의 시작은 기원전 6세기 전입니다. 이야기의 장소는 밀레토스. 오늘날로 치면 터키 서부 연안에 해당하는 지역이죠. 밀레토스와 그 주변 지역은 당시에 이오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리스에서 출발한 뒤, 에게해를 지나, 동쪽으로 나아가면 만날 수 있는 지역인데요. 기원전 1100년 경 도리아인들이 그리스 본토를 침공하자, 크수토스의 아들인 이온이 사람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이오니아 지역으로 이동했다고 알려집니다. 참고로 이오니아라는 이름은 이온의 이름을 따서 만든 명칭이죠.
도리아인들을 피해 이오니아에 정착한 피난민들은 이후 수많은 개척 도시를 세웠습니다. 당시 그리스는 여러 개의 도시 국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전에 비해 농업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늘어나면서 넓은 땅을 소유한 귀족들이 다수 출연하긴 했지만, 험한 산과 바다, 섬에 가로막힌 탓에 이곳을 한데 묶어서 통치할 만한 세력은 나오지 않았던 거죠.
고대 그리스의 7현인 중 한 사람이자 최초의 현자, 또는 서양철학의 문을 연 것으로 평가 받는 탈레스(Thales)는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영토 곳곳에 크고 작은 도시들이 생겨나며 상호 무역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그덕에 무역을 책임질 상선의 왕래가 자유로운 해안 주변의 도시가 크게 성장한 것이죠. 선단과 식민지 보호를 위해 점점 더 큰 전함이 만들어졌고, 도로와 요새, 항구 등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직업군인 피시코이(physikoi)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밀레토스는 이런 특징을 가진 지역에서도 가장 강성한 도시로 발돋움한 곳이었습니다. 이곳의 주력 산업은 목양이었다고 해요. 그들이 깎은 양털은 지중해를 건너 수출되었고, 이오니아의 여러 도시들이 흑해 주변까지 식민지를 확장하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죠. 국경이 멀리멀리 확장된 덕분에 밀레토스 지역의 사상가들은 내륙 지역의 사상과 고대 이집트의 발전된 문명을 동시에 접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것이 밀레토스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부유했다거나 근심걱정 없이 철학을 할 수 있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는 이 시기가 자그만치 2600년 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해요. 현대의 관점에서 볼 때 당대의 농업 생산량이나 기술 발전도는 보잘 것 없습니다. 소수의 귀족을 제외한 나머지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힘들었다고 보는 게 오히려 정상이죠.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 깊이 사색하는 철학자에 대한 이미지가 좋을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후대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술한 탈레스의 일화에 이런 시대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죠. 그 내용을 한 번 읽어볼게요.
“사람들이 탈레스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철학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며 비난하자 그는 자신의 천문학 지식을 토대로 올해는 올리브 수확이 풍년이 될 거라고 예언했다. 그러고는 겨울에 자신이 가진 얼마 안 되는 돈을 계약금으로 걸고 밀레토스와 키오스에 있는 기름 짜는 기계를 모두 싼값에 빌렸다. 당연히 그보다 비싼 가격을 부른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수확할 시기가 다가와 갑자기 한꺼번에 기름짜는 기계가 필요해지자 그는 원하는 만큼 비싼 값에 기계들을 다시 빌려주었고, 그런 식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마음만 먹으면 철학자들에게 부자가 되는 건 쉬운 일이지만 그들이 원하는 건 결코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럼 탈레스는 대체 어떤 주장을 했길래 ‘서양 최초의 철학자’라는 수식어를 얻게 되었을까요? 사실 탈레스 이전의 사람들은 모든 만물이 ‘신’에 의해 만들어지고, 바뀌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해하기 어렵거나 접근이 불가능한 상황 등을 ‘신이 그리했다’거나 ‘신이 노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그만이었죠. 신들의 결정과 질투, 다툼, 애정 등으로 인해 세상이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하는 그리스 신화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탈레스는 항구도시 밀레투스 출신답게 이 세계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 즉 세상이 특정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입장은 탈레스를 비롯한 여러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의 주요 사고방식 중 하나입니다. 이들은 세계가 특정 물질의 응축이나 기화 등을 통해 형성된다고 생각했는데요. 탈레스가 그 물질로 물을 지목한 것은 식물이 물을 머금고 자라나는 모습, 인간을 비롯한 동물에게 있어서 물의 중요성 등을 떠올렸기 때문으로 추측됩니다.
오늘날에는 조금 우습게 느껴지기도 하는 이 생각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일종의 ‘과학적 사고’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 최초의 시도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탈레스는 올리브의 풍년을 미리 알아챈 것 외에도 그림자 높이의 비례 값을 이용해 피라미드의 높이를 재거나, 천문학 지식을 활용하여 기원전 585년의 일식을 예측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일식의 이유도 정확히 맞혔습니다.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달의 그림자가 지구를 가리기 때문”이라고 말이죠. 이밖에도 그는 달이 태양 빛을 반사하기만 한다는 명제를 최초로 주장하기도 했으며, 나일강의 범람 이유를 나름의 관측을 통해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분석력을 바탕으로 세상을 보다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를 통해 ‘인간의 사유가 뮈토스에서 로고스로, 즉 신화적 사유에서 논리적 사유로 이행하게 된 것’이죠.
물론 그의 주장이 아주 현대적이거나 과학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세상이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 외에도 지구가 마치 나뭇조각처럼 물 위에 떠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이는 기원전 8세기경의 유랑시인인 호메로스의 주장과도 꽤 유사합니다. 그는 하늘이 우리 위에 둥근 지붕처럼 얹혀 있고,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그 아래에 존재한다고 믿었는데요. 이는 과학적 탐구를 통해 나온 사고라기보다는 종교적 혹은 신학적 전통에 바탕을 둔 사고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밖에도 탈레스는 ‘만물이 신으로 가득차 있다’거나 ‘자석은 쇠를 끌어당기기 때문에 영혼, 즉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아직 그가 전적으로 과학적인 사고만을 하기에는 어려운 시대에 살았음을 우리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죠.
오랜 세월이 지난데다 탈레스와 관련해 남아 있는 사료가 많지 않은 탓에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이러한 사고의 밑바탕이 무엇이었는지 등을 자세하게 알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전 세대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려고 했다는 점, 구체적인 현상을 관찰하고 사고하려 했다는 점에 비춰 그가 ‘철학의 아버지’ 또는 ‘최초의 철학자’라는 수식어를 얻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철학이란 결국 세상과 삶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한 학문이니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