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인상주의는 1880년부터 1905년까지 이어진 프랑스 미술의 경향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용어는 영국의 미술비평가인 로저 프라이가 1910년에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라는 전시회를 기획하며 처음 사용되었는데요. 이후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영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작품 세계를 열고자 한 화가들을 통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세잔, 고갱, 고흐 등을 지칭하며, 동시대 화가인 드가와 르누아르, 야수주의자인 마티스와 드랭, 블라맹크까지 포함하는 경우도 있죠. 여기서는 가장 대표적인 화가로 손꼽히는 세잔과 고갱, 고흐를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소개할 후기 인상파 화가 폴 세잔은 원래 젊은 시절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부유한 은행가였던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화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대학 입학 후 2년 가까이 방황을 이어갑니다. 결국 이를 안타깝게 여긴 어머니가 아버지를 설득해 파리에서 회화 공부를 시작했죠.
하지만 화가가 되는 길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아틀리에에 들어가 미술 공부를 시작했지만 몇몇 다른 학생들보다 자신의 기교가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우울증에 빠진 것이죠. 게다가 도시 생활도 그에게 맞지 않았습니다. 5개월만에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아버지의 은행에서 일하고 그 생활에 만족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열망을 이기지 못하고 1년 뒤 다시 파리로 돌아가게 되었죠. 이후 그는 파리와 고향을 여러 번 오갔지만 꾸준히 그림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1882년에는 살롱전에 입선하고, 1895년에는 개인전도 개최할 수 있었죠.
그의 작품은 세계는 대개 1870년대와 1880년대, 1890년대 이후로 나뉩니다. 1860년대 어두운 바로크 풍의 그림을 그리던 그는 1870년대 초 자신이 신이자 아버지라고 부른 화가 카미유 피사로의 초대를 받아 한동안 퐁투아즈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는 10여 년에 걸쳐 피사로와 함께 풍경화를 그리며 영향을 주고 받았는데요. 특히 그의 영향을 받아 인상주의에 대한 진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됩니다. 까칠하고 무뚝뚝한 성격 탓에 피사로 외의 인상주의 화가들과 잘 어울리지는 못했지만, 두 번의 인상파 전시회에 참가하며 활동 영역을 넓혀갔죠.
하지만 그는 색채와 빛을 통해 짧은 순간에 포착된 사물의 모습을 기록하는 인상파의 방식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1880년대 초부터 약 10년간 프로방스에 머물며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만들어 간 건데요. 특히 그의 아내인 오르탕스의 남동생이 소유한 에스타크의 생트 빅투아르 산이 보이는 집에 머물며 다양한 시도를 전개했습니다. 1880년부터 1883년 사이에 산을 배경으로 그려진 그림들과 1885년부터 1888년 사이에 프랑스 남부의 가르단에서 그린 그림은 ‘건설기’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죠.
마지막 시기인 1890년 이후 세잔은 외로운 생활을 지속해야 했습니다. 당뇨병을 앓기 시작했고, 작품에만 몰두하며 가족과 친구들에게서 멀어졌죠. 하지만 이 시기의 작품들은 후대 작가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특히 1890년대 중반부터 생트 빅투아르 산에 작은 집을 얻고 다양한 그림을 그렸는데요, 이 시기의 작품들은 초기 입체파 양식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지죠.
그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건강은 정반대의 길을 겪었는데요. 1906년 악화된 당뇨병을 안고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던 그는 소나기를 만나 심한 폐렴에 걸려 일주일만에 생을 마감했죠. 이듬해인 1907년 파리의 가을 살롱전에는 그와 그의 작품을 기리는 대규모 전람회가 개최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소개할 후기 인상주의 작가는 폴 고갱입니다. 예술에 천착한 삶을 산 탓에 훗날 서머싯 몸이 쓴 광기 어린 화가에 관한 소설 <달과 6펜스>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죠. 그의 젊은 시절은 어려움과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클로비 고갱은 진보적 성향의 정치부 기자였습니다. 그런데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나 공화정이 되면서 프랑스는 정치적 혼란기를 겪게 되었고,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클로비 고갱은 페루의 수도인 리마로 이주해 신문사를 차리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가족들을 데리고 페루로 가는 여객선에서 그는 심장병으로 사망하게 되고, 남겨진 가족들은 리마에서 약 5년동안 불행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1854년 고갱의 가족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오를레앙에 정착합니다. 그곳에 그의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이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생활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렸고, 고갱은 1865년 선박의 항로를 담당하는 견습 도선사가 되어 라틴아메리카와 북극 등 세계 곳곳을 돌아다녀야 했죠. 그러던 중 1871년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나게 되고, 그는 1872년 선원 생활을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와 증권거래점의 점원이 되어 점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안정적인 삶을 얻게 된 그는 결혼 후 다섯 명의 아이를 얻게 됩니다. 이 무렵부터 그는 회화에 조금씩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요. 처음에는 인상파 작가의 작품을 수집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차츰 범위가 넓어져 갔습니다. 20대 후반부터 회화연구소에 다니기 시작했고, 1876년에는 살롱에 처음으로 자신의 그림을 출품하기도 했죠. 이후 35살이 되던 해, 그는 증권 거래소를 완전히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성공은 멀리 있었습니다. 생활은 점점 더 궁핍해졌고, 작품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죠. 결국 그는 1886년 아내와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그림에 전념하고자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이사를 결심하게 됩니다. 이주 후 그가 그린 〈퐁타방의 빨래하는 여인들〉, 〈브르타뉴의 시골 여인들〉 등에서는 파격적인 구도와 단순화되고 평명적인 형태 묘사, 짙은 윤곽선 등 고갱 특유의 시도들이 이뤄집니다. 더불어 반 고흐와 함께 아를에서 공동생활을 한 시기도 이 즈음에 해당하죠.
그의 회화세계를 완전히 뒤바꾼 경험은 43살 생일이 하루 지난날부터였습니다. 남태평양 타이티 섬에 도달한 것인데요. 그는 원시의 모습이 남아 있는 섬의 어느 모퉁이에 정착하고 2년간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이때 그린 60여 점의 그림은 독특하고 과감한 색채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며, 훗날 그의 사후 가장 위대한 걸작들로 추앙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말년은 그리 순탄치 못했습니다. 그의 그림은 여전히 인정받지 못했고, 그의 친구와 후원자들 역시 세상을 뜬지 오래였죠. 결국 그는 타히티로 되돌아가기를 결심합니다. 하지만 되돌아온 타히티 섬 역시 그가 바라던 원시의 순수함이 사라져 가고 있는 중이었고, 그는 더욱 비문명화된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오아 섬으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이곳에서 식민지 관료와 선교사의 전횡을 목격하고 고발하는 했지만 패소했고, 이후 건강 악화로 한 달 넘게 병상 신세를 지던 중 1903년 5월에 결국 사망하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