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의 슈퍼스타,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에 관한 미스테리를 다룬 영화 <러빙 빈센트>의 감독 휴 웰치멘은 자신이 이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에 관한 애니메이션(그것도 반 고흐와 똑같은 유화로 그린!)을 구상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영국 출신의 휴 웰치멘은 어느 날 런던에서 반 고흐의 전시회를 보러 갔다고 합니다. 줄은 하염 없이 길었는데요. 세 시간 여의 기다림 끝에 그가 마주하게 된 것은 실망스럽기 그지 없는 것들이었다고 하죠. 반 고흐의 작품이라고는 겨우 세 점에 불과했고, 나머지 공간에는 그가 쓴 편지들이 정성스레 캐비닛 안에서 전시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러빙 빈센트의 한 장면

그는 수많은 인파가 고작(?) 이런 전시회를 보러 온 모습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 이 사람이야!’
굳이 이런 예를 들지 않아도 빈센트 반 고흐는 누가 뭐래도 오늘날 가장 유명하며,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작가 중 한 사람임에 틀림 없습니다. 아무리 그림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별이 빛나는 밤>나 <해바라기>, <자화상> 같은 그의 작품 한 두 점 정도는 매우 익숙하게 느껴질 것이며, 그가 자신의 귀를 잘랐다거나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 정도는 들어봤을 테니 말이죠. 무엇이 생전에 겨우 그림 한 점을 판 그를 이처럼 유명하게 만들었을까요?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많은 작가들과 달리, 20대 후반까지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유명한 작품들은 대부분 그가 37살의 나이에 생을 마감하기 직전 약 2년동안 그려졌죠.

젊은 시절의 그는 종교 활동과 사회 봉사에 헌신했습니다. 동생 테오의 아내가 ‘그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말하는 20대 초반, 그는 아트 딜러로 활동했는데요. 꽤 큰 돈을 벌기도 했지만 예술작품이 상품으로 취급된다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말았죠. 이후 신학 공부를 시작했지만 이 역시 그의 적성과는 그지 맞지 않았습니다. 암스테르담 신학대학에 낙방했고, 전도사 양성학교에서도 그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여겨 6개월간 평신도로서 전도 활동만을 허가했던 것이죠. 그는 벨기에의 석탄 마을에 임시 선교활동을 떠났지만, 그의 광신도적인 기질과 격정적인 성격으로 인해 결국 전도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후 동생 테오의 권유로 그림을 시작한 그는 예술을 통해 인류에게 위안을 주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가 예술가로 활동한 기간은 1880년부터 1890년까지 약 10년 여에 불과한데요. 이중에도 처음 4년간은 미술 기법을 익히며 데생과 수채화에 전념했죠.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년, 캔버스에 유채, 82x114cm,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1885년 네덜란드 북부 브라반트의 뇌넨으로 이사한 반 고흐는 자신의 첫 걸작으로 손꼽히는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그는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이 그림이야말로 내 그림 가운데 최고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하죠. 어둡고 칙칙한 색조를 특징으로 하는 초기 작품의 성격을 지녔으며, 그림 속에 등장하는 가족의 모습을 한 명씩 따로, 수십 번에 걸쳐 그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1886년 파리로 건너간 그는 인상주의, 신인상주의 화가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게 됩니다. 화법의 변화도 극명했는데요. 색상은 다채로워졌고, 색조는 밝아졌으며, 시각 역시 전통적인 부분을 많이 벗어나게 되었죠. <이젤 앞에 선 자화상>, <탕기 영감의 초상> 등 많은 걸작을 그렸으며, 사람들은 이 시기를 그의 ‘후기인상파’ 양식이 꽃피우기 시작한 시점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1888년 2월, 그는 파리를 떠나 자신의 예술적 여정의 종착지가 될 아를로 떠납니다. 도시생활에 대한 싫증을 ‘좀 더 밝은 하늘 밑에서 자연을 바라보’며 해소하기 위해서였죠. 아를에서의 첫 1년은 그의 첫 번째 전성기였습니다. 뚜렷한 윤곽과 강렬한 색채, 그럼에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이 시기 그림의 특징이죠. 그는 끊임 없이 그렸습니다. 자화상을 그렸고, 자신의 집을 그렸으며, 살고 있는 마을을 그렸고, 주변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해바라기 연작과 <별이 빛나는 밤> 등의 작품이 나온 것도 이 시기죠.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년, 캔버스에 유채, 73.7x92.1cm, 뉴욕: 현대미술관

이후 그는 고갱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노란집’이라 불리는 곳이었죠. 그는 자신과 비슷한 목표를 지닌 화가들과 함께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하며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하지만 툭하면 생겨나는 의견 대립과 성격차이 등으로 인해 두 사람이 함께 한 시간은 고작 2개월에 불과했죠.

1888년 12월, 신경과민으로 인한 발작 증세로 그는 자신의 왼쪽 귀 일부를 잘랐습니다. 자신의 귀 조각을 매춘부에게 건네며 ‘이 오브제를 잘 간직하라’고 이야기했다고 하죠. 이후 신고를 받은 경찰에 의해 그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아를의 주민들은 그를 ‘미친 네덜란드 사내’라며 마을을 떠나라고 강요했습니다. 결국 1889년 5월, 그는 생레미의 한 정신병에 들어갑니다.

1890년 파리 근교의 오베르쉬르우아즈로 간 그는, 근처 들판을 서성이다 결국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았습니다.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간 뒤, 심하게 앓던 그는 이틀 뒤 동생 테오가 바라보는 앞에서 37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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