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세계’와 68운동
앞서 우리는 전쟁 이후 형성된 새로운 국제질서가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어떤 모습을 띠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사태가 끝나고 미국과 소련이 화해 분위기에 들어가면서 1960년대 중반 세계는 평화와 번영의 길로 접어드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서구 중심 국가들의 시선에서만 그랬죠. 제 3세계로 분류되는 국가들에게 이 시기는 혼란과 고난의 시기였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미국과 소련: 냉전 체제의 형성
18세기 계몽주의 이후로 서양 사회는 인류가 이성의 힘으로 끝없이 진보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19세기의 급격한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겪으며 이러한 믿음은 구체적인 이념으로 발전했어요. 의회 민주주의와 법치를 강조하는 자유주의, 그리고 노동자들의 권리와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가 그것이었죠. 두 사상은 서로 반목하기도 했지만, 사회주의는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계몽주의에 뿌리를 두고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1차대전이 끝나고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베르샤유 조약을 맺어 패전국 독일에 엄청난 배상금을 물렸습니다. 전쟁의 모든 책임을 독일에 돌리고 독일이 다시 재기하기 못하게끔 한 것이었죠. 1차대전의 원인이 어느 특정한 나라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인들은 두 나라에 대한 반감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승전국의 조치에 복수하고 독일을 다시 강대국의 위치로 올려놓겠다면서 이
경기침체와 대공황, 그리고 대서양 세계의 변화
포드는 늘어난 생산력과 구매력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사회를 상상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죠. 생산성이 늘어나는 만큼 임금이 오르지는 않았거든요. 19세기 말부터 대공황 이전까지 서구 사회의 산업 생산량은 매년 5%가량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임금상승률은 1%를 조금 넘는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한 마디로, 물건을 늘어났지만 그것을 살 사람은 그만큼 늘어나지 않았어요.
포드주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사회의 개막
미국의 기업가 핸리 포드는 1차대전을 전후로 한 시점에 기업과 노동자가 맺을 수 있는 새로운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두 세력이 국가의 개입이 없어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값비싼 교통수단이었던 자동차를 처음으로 대중화시켰던 포드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기초한 사회에서는 양자가 갈등 없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어요. Photo by Mike
총력전: 1차대전과 새로운 정치경제의 등장
영미권에서는 1차 세계대전을 “The Great War”라고 부릅니다. 이전 전쟁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였고 전쟁을 수행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죠. 전쟁 초기까지만 해도 당대인들은 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할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만, 전쟁 기간 동안 목숨을 잃은 사람은 1200만여 명에 달했고, 전쟁으로 인한 기아와 질병으로 희생된 사람을 포함하면 그 수는 2500만여
제국주의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1897년 고종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조금 웃긴 일이었죠. 힘도 없는 나라가 ‘제국’이라뇨. 하지만 당대 세계인들의 인식을 고려했을 때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습니다. 19세기 말 세계의 각 지역은 제국과 식민지로 나뉘어가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국이라는 간판은 독립국임을 알리는 한 방법일 수 있었습니다. 유럽은 16세기부터 식민지를
자유의 여신을 찾아서: 이주의 역사
영화 <대부>에는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에 살던 비토 꼴리오네가 자유의 여신상을 보며 뉴욕에 입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가 1900년을 전후한 시점이었죠. 대형 증기여객선을 이용한 여행이 보편화되고 국제적인 노동시장이 형성되면서 노동력이 남는 곳에서 부족한 곳으로의 이동이 증가했습니다. 1880년부터 1914년까지 3200만 명가량이 유럽을 떠나 아메리카 등지로 이주했죠. 19세기 이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