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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바로크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의 통치자 중 한 명인 루이 14세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짐은 곧 국가다’라는 말로 유명한 그는 국가의 권위를 옹호하는 동시에 통치자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했는데요. 자신의 군주권과 왕국의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예술에도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는 문화와 예술을 자신의 틀에 맞춰 관리하고자 ‘아카데미(Academy)’를 설립했습니다. 아카데미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플라톤이 철학 수업을 한 아테네 근교의 지명 ‘아카데메이아’에서 이름을 따온 것인데요. 그곳의 교장이었던 르 브륀은 예술 창작에도 절대적인 규범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때문에 기하학, 선원근법 등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규범을 탐구하는 것이 아카데미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죠.
여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가는 니콜라 푸생이었습니다. 그는 고대 로마의 조각과 건축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림이 화려하고 현란한 요소보다는 근본적이며 보편적인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굳게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보편성에 얼마나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는지 루이 13세가 그를 수석 궁정화가로 임명한 뒤, 루브르 궁의 천장에 날아다니는 성인을 그리라고 명령하자 ‘인간이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은 논리적으로 어긋나므로 그릴 수 없다’고 거절했을 정도였다고 하죠. 결국 그는 1년만에 로마로 되돌아 갔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그림은 뚜렷한 윤곽선과 밝은 색채, 명확하고 입체적인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는 당시 루벤스로 대표되는 바로크 미술 경향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고전주의 경향을 지니는 것이었는데요. 이후 그의 미술이론과 조형 양식이 프랑스 예술 아카데미의 교육 토대가 됨으로써 200년 가까이 프랑스 및 유럽 예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전주의 경향은 건축 분야에서도 두드러집니다. 파리 외곽에 위치한 베르사유 궁전은 방문객에게 자신과 프랑스의 영향력을 과시하고, 왕실에 힘을 결집하려는 의도로 지어졌는데요. 2000여 명의 귀족과 18000명이 넘는 근위대 병사들 및 시종이 거주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합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엄격한 질서를 특징으로 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건물의 전면부 너머 대운하와 정원에서 잘 드러나는데요. 십자형태의 운하 중심축은 U자형 궁전 본관의 중심축으로 연결되었으며, 정원은 자연적인 숲과 덩쿨 대신 기하학적 패턴으로 장식되어 있죠. 어찌나 수학적으로 정원이 설계되었는지 루이 14세의 정부인 맹트농 부인은 “어딜 가나 좌우대칭뿐”이라고 불평했다고 하는데요. ‘프랑스식 정원’이라 불리는 이 정원은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영국식 정원’과 함께 서양 조경 디자인의 양대 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