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6년 7월 2일, 세네갈로 향하던 배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메두사호. 프리깃 전함을 개조한 배로 세네갈의 생루이 항구를 차지하기 위해 항해하는 중이었죠.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해 부르봉 왕조가 복위한 상황이었는데요. 왕당파 출신의 퇴역 장성이자 메두사호의 선장 위그 뒤 쇼마리는 25년간 배를 탄 적도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자격 미달의 인물이 뇌물을 주고 배의 함장이 되었던 것이죠.
그런 상황에서 아프리카 서부 해안을 항해하던 메두사호는 암초에 걸려 좌초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배에는 6개의 구명보트뿐. 쇼마리 선장은 400여 명의 선원과 승객 가운데 세네갈 총독을 포함한 고위 공무원, 장교 등 절반 가량을 보트에 태웠습니다. 그리고 남은 149명은 부서진 배의 목재를 엮어 만든 뗏목에 타게 했죠.
동력이 없는 뗏목은 앞선 보트과 밧줄로 연결에 끌고 가기로 약속한 상황. 하지만 선장은 보트가 잘 나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결된 밧줄을 끊은 채 떠나버렸습니다. 망망대해 위에 버려진 뗏목 위에선 광기 어린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반란이 일어나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물과 식량이 부족해진 사람들은 가죽과 천을 먹기 시작했죠. 그리고 그마저 부족해진 사람들은 약한 자들을 죽여 서로 잡아먹는 일까지 벌였습니다.
지옥 같은 2주가 지난 뒤, 근처를 지나가던 아르귀스호에 사람들이 구조되었을 때는 고작 15명의 사람들만 살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들 대부분이 충격적인 일을 겪고 정신이상자가 되어 버렸고요.
이 사건은 부패한 관료와 정부에 의해 은폐될 뻔 했습니다. 하지만 남은 생존자 중 한 명인 그 배의 외과 의사가 비극의 전모를 밝힘으로써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세네갈 총독은 법으로 금지된 노예 무역을 하던 것을 은폐하려 했으며, 메두사호의 선장 역시 무능력한 인물임이 밝혀지게 되었죠.
사건을 접한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는 생존자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시체 보관소에 가서 부패한 시체를 관찰하고, 보소 수용소에 가 광인들의 얼굴과 처형당한 죄수들을 스케치했죠. 심지어 그는 더욱 세밀하고 정확한 묘사를 위해 자신의 화실에서 뗏목을 만든 뒤 폭풍우 속에서 몰아보기도 했습니다.
그의 작품 <메두사호의 뗏목>에는 우리가 오랫동안 미덕으로 여긴 따뜻한 인간성 대신 인간의 극단적 광기와 고통, 슬픔 등이 담겨있습니다. 작품을 본 사람들 역시 큰 충격을 받았는데요. 이후 프랑스 미술은 사실보다 감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죠.
그는 32살의 나이에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0여 년의 작품활동 기간 동안 오직 세 개의 작품만을 세상에 내보였는데요. 작품 활동 외에도 소외받은 자들을 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다고 알려집니다.
제리코의 뒤를 이은 화가는 외젠 들라크루아입니다. 그는 일반적 의미의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인물인데요. 그는 회화란 ‘선 위에 색을 입히는 작업’이라는 개념을 바꾼 사람이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번지듯 색채를 인접시켜 형태를 완성하는 방식을 사용했는데요. 이 방식은 이후 반 고흐, 드가, 세잔, 쇠라 등에게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의 대표작인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은 이런 그의 화풍과 더불어 사납고 날카로운 주제를 선호한 그의 성향을 보여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