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美)에서 구원으로, 초기 기독교 미술

우리는 중세를 흔히 미술의 ‘암흑기’라고 부릅니다. 이전 시대와 확연히 구분되는 이질적인 형태의 미술을 만나볼 수 있는 데다, 그리스∙로마 시대에 발전한 사실적인 묘사 기법들이 마치 그런 적 없었다는 것처럼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죠.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많이 사람들은 흔히 그 원인으로 중세 기독교의 막강한 영향력을 언급합니다. 서구 사회는 로마 제국이 몰락한 뒤 한동안 혼란기에 빠졌습니다. 유럽 왕국이 다수 출현했고, 기독교가 이들 국가를 통합하는 역할을 했죠. 관심사는 현세가 아닌 내세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육체를 아름다움의 대상이 아닌 타락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영적 가치와 교리 전달에 집중했죠. 물론 미술의 역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물과 사물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데에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던 것이죠. 이런 변화를 전문 예술가 집단의 몰락에서 그 이유를 찾는 시각도 있습니다. 로마 귀족들의 경우 그리스 미술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졌기 때문에 그 기법과 예술성이 보존될 수 있었지만, 중세가 되면서 그들의 지원을 받던 예술가들 역시 자연스럽게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는 거죠.

<나사로의 부활>, 4세기경, 비아 라티나의 카타콤

우리는 보통 중세의 시작을 기독교의 공인이 이루어진 4세기 무렵으로 보고 있습니다. 기독교 미술은 그보다 조금 앞선 3세기경에 시작되었는데요. 이 시기는 기독교가 인정되지 않아 기독교인들은 많은 핍박을 받는 시기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피해 카타콤(Catacomb)이라고 불리는 지하묘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요. 카타콤의 벽과 천장에는 많은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이 시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익숙한 이미지, 즉 고대 그리스와 로마풍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예수의 이미지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이 아닌 수염 하나 없는 젊은이의 모습이죠.

조화나 아름다움보다 성서의 정확한 묘사와 기록을 추구한 것 역시 초기 기독교 미술의 특징입니다. 구약성서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 왕이 바빌론의 두라 평원에 자신의 모습을 한 황금상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숭배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이때 이를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다니엘과 하나니야, 아자리야였죠. 이들은 유태인 고관들이었는데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런 결정을 했고, 결국 화형을 당하게 되었죠. 하지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세 사람 모두 천사의 도움으로 머리카락 하나 그슬리지 않았던 것이죠.

<타오르는 불길 속의 세 사람>, 3세기경, 프리스킬라 카타콤 벽화

그럼 이제 그림을 살펴보죠. 위 그림은 3세기경 프리스킬라 카타콤에 그려진 그립입니다. 만약 그리스의 고전기, 헬레니즘기의 화가 혹은 조각가들이 이 그림을 보았다면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아마 좋은 대답이 나오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이게 무슨 애들 장난이냐”며 말이죠.

하지만 이 시기의 그림은 이전의 미술과는 다른 목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바로 앞서 말한 ‘성서의 정확한 묘사와 기록’이 그것이죠. 그림은 세 사람이 지닌 불굴의 신앙심과 신의 구원을 보여주는 정도면 충분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림은 페르시아 옷을 입은 세 사람과 불길, 구원을 상징하는 비둘기 정도면 족했고요. 즉, 지상의 아름다움 외에도 구원의 세계를 향해 눈을 돌린 시기가 바로 중세였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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