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시장’의 개막, 네덜란드

네덜란드의 바로크 예술은 1610년부터 1670년 사이에 절정을 이뤘습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인접국인 플랑드르와 다르게 신교가 지배적인 국가였는데요. 이로 인해 가톨릭 지역의 예술가들처럼 교회의 주문을 받을 수 없어 새로운 미술 장르가 개발될 필요가 생겨났습니다. 더불어 당시 네덜란드에선 시민계급이 주도하는 새로운 정치 체제가 완성되었는데요. 그 결과로 왕실이나 귀족 계급 같은 기존의 주요 후원자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부르주아 소비 계층이 채우게 되었죠.


이런 변화로 인해 미술가들은 새로운 변화를 마주하게 됩니다. 즉, 역사상 처음으로 미술 시장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거래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죠. 하지만 당시 네덜란드의 폭발적인 경제 성장은 미술가들을 돕는 역할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미술품을 갖고자 하는 욕구에 불을 지피게 된 것이죠. 소위 ‘튤립 마니아(tulip mania)’라고 불리는 튤립 구근 투기현상도 이 시기에 일어났는데요. 얼마나 비정상적으로 투기가 일어났는지 진귀한 튤립 구근 한 뿌리의 가격이 황소 수 십 마리 가격에 버금갈 정도였다고 합니다.

1636년 하반기부터 1637년 상반기까지 튤립 가격의 변동 추이. 튤립 파동은 역사상 최초의 자본주의적 투기 형상이라고 불린다.


어쨌든 당시 미술품 구매자들은 개별적으로는 기존의 교회 권력이나 귀족 후원자보다 재력이나 권력, 교육 수준 등이 다소 떨어지는 편이었습니다. 때문에 미술품의 단가나 규모도 이전에 비해 작아질 수밖에 없었죠. 그러나 미술 시장의 전체 규모는 크게 성장했는데요. 화가들은 이런 변화에 발맞춰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했습니다. 정물화, 해양화, 실내화, 동물화 등 소비자가 선호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죠. 우리가 흔히 장르(genre)라고 부르는 미술의 유형과 분야가 확립된 겁니다. 더불어 특정 장르만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가들도 출현하게 되었는데요. 당시 네덜란드에는 정물화 한 분야에만 500명이 넘는 화가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중에도 거장의 반열에 오른 화가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첫 번째 작가는 서구 미술사상 가장 유명한 작가 중 한 명인 렘브란트 판 레인입니다. 그는 생전에도 유명한 초상화가였습니다. 그 역시 이러한 명성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걸맞은 생활 양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여겼는데요. 젊은 시절 누린 호화스런 집과 사치, 방탕이 중년의 그를 어려움으로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40대가 되어갈 무렵 자신의 집과 미술 컬렉션이 경매에 붙여지고 말았는데요. 그가 죽은 당시 그에게는 물감으로 더럽혀진 옷 몇 벌과 화구만이 남아 있었다고 하죠.

렘브란트, 〈야간 순찰대〉, 1642년, 캔버스에 유화, 379×453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암스테르담


그룹 초상화의 혁신으로 일컬어지는 <야간 순찰대>는 그의 생이 요동치던 시기에 그려졌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고, 아이들 역시 영아기 때 사망했죠. 이런 상황이 그의 그림에도 영향을 미쳤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그림이 이전과는 다른 것은 확실했습니다. 극적인 명암의 대조법을 사용해 극적이고 박력있는 묘사를 보여주던 초기작과는 달리, 후기의 작품들은 금빛과 갈색톤의 미묘한 명암법을 사용해 정적이고 사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특히 그는 카라바조가 발견한 어둠을 더욱 깊이 사용했는데요. 렘브란트의 어둠은 빛을 받쳐주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외려 빛을 감싸며 그 자체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죠.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1666년경, 마우리츠하이스 왕립미술관

두 번째 작가는 델프트의 스핑크스로 불리는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입니다. 그가 이런 별명을 얻은 것은 생애가 대부분 수수께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림을 배우려 잠시 이탈리아에 다녀온 것 외에는 대부분 델프트에서 살았다고 하죠. 그는 평생 40여 점의 그림밖에 그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빛을 잘 사용한 작가는 서양 미술사 전체를 통틀어 몇 명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부드럽고 은은한 빛은 그림 전체를 감싸고 있으며, 세세하고 정밀한 묘사를 통해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그림마저 조화롭고 균형잡힌 형태로 바꾸어 놓았죠. 하지만 그림만큼 그의 삶이 밝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식이 11명이나 있었던 그는 40대 초반의 나이에 생활고로 숨을 거두었고, 부인은 법원에 파산 신청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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