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윌리엄 터너와 존 컨스터블은 풍경화를 미술의 주요 장르 중 하나로 만드는데 일조한 인물입니다. 이들은 관습대로 풍경화를 그리던 이전 화가들과 달리, 자연을 깊이 관찰한 뒤에야 그림을 그렸습니다. 덕분에 두 사람 모두 근대 풍경화의 선구자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는데요. 세부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각각 차이점과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터너는 어린 시절부터 주목 받는 작가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런던의 가난한 이발사였는데요. 터너는 어린 시절부터 학교를 다니지 않고 손님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취미로 삼았다고 합니다. 일찍 재능에 눈을 뜬 그는 12살의 나이에 수채화를 팔 수 있었고, 15살에는 왕립 아카데미에 전시를 하기도 했죠.
그의 초기 작품은 세부묘사를 위주로 조용하며 친근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러한 그의 그림은 금새 인기를 얻게 되었죠. 하지만 유럽 여행 직후부터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풍경화 세계를 구축합니다. 조용하고 평안한 시골 풍경 대신 폭풍우 등의 자연에 도전하는 인간의 모습, 붉게 묽든 석양이나 높게 치솟은 알프스 산맥의 봉우리 등을 그린 것이죠.
말년에 가서 그는 거의 추상화나 다름 없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물감 덩어리와 붓질이 마구 뒤엉켜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는데요. 동시대의 한 비평가는 이런 그의 그림을 두고 “그는 시적인 그림을 그리려면 난해해야 한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며 혹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낸 색채와 자연에 대한 태도는 후대 화가들에 의해 재평가 받았고, 인상주의가 발전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반면 컨스터블은 생전에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39살까지 단 한 점의 그림도 팔지 못했으며, 아카데미 회원이 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죠.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을 확고하게 지켜나갔습니다. 자연을 탐구하지 않고 그저 관습대로만 풍경을 그리는 화가가 되기를 거부한 것이죠. 그는 풍경화란 자연을 직접 관찰한 끝에 나온 결과물이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개천과 수풀이 많은 고향의 자연을 애정어린 시각으로 바라보았으며, 이상화되지 않은 모습 그대로를 그리고자 노력했죠. 이런 입장은 “상상 속 풍경을 그린 그림은 실제의 풍경에 근거한 작품을 결코 따라갈 수 없다”는 그의 이야기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후 컨스터블의 그림은 프랑스 출신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색채를 팔레트에서 미리 섞지 않고 캔버스에 직접 바르거나, 유사색 혹은 보색을 이용해 선명한 효과를 내는 그의 기법에 감탄한 것이죠. 특히 장 프랑수아 밀레로 대표되는 바르비종파의 화가들은 컨스터블의 화풍을 직접적으로 계승한 것으로 평가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