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종말?
지금까지 우리는 서구 사회에서 ‘근대’라는 기획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탄생했고 어떠한 과실과 어두움을 남겼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에 기대어 자유와 평등을 확대시키고 동시에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오겠다는, 실로 야심찬 계획이었죠. 이 계획은 주로 국민국가에 의해 추진되었어요. 그들에게는 몇 가지 선택지가 있었죠. 자본주의 국가들은 시장의 힘을, 사회주의 국가들은 계획의 힘을 빌려야
석유파동과 세계경제의 변화
2차대전 이후의 세계는 이전의 제국주의적 착취에서 어느 정도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국제적인 분업체계가 형성되면서 주권을 지닌 세계 각국이 각자의 역할을 분담해 자원을 제공하고, 자원을 가공해 부품을 만들고, 부품을 조립해 제품을 만들며, 제품을 소비하며, 이를 위한 투자를 수행했던 것이에요. 물론 이러한 분업이 완전히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힘들지만요. 전후경제에서 가장 중요했던 자원은
‘제3세계’와 68운동
앞서 우리는 전쟁 이후 형성된 새로운 국제질서가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어떤 모습을 띠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사태가 끝나고 미국과 소련이 화해 분위기에 들어가면서 1960년대 중반 세계는 평화와 번영의 길로 접어드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서구 중심 국가들의 시선에서만 그랬죠. 제 3세계로 분류되는 국가들에게 이 시기는 혼란과 고난의 시기였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경제 부흥의 시대
2차대전이 끝나고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대공황 같은 위기가 반복되지 않을 세계경제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과거의 경제적 위기는 파시즘의 부상을 일으켰죠. 만약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오면 사회주의가 세계적으로 부상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미국과 영국은 자유무역을 보장하는 것이 경제 안정의 핵심이라고 믿었습니다. 모든 나라가 공통의 규칙을 지키며 무역에 참여한다면, 혹시
미국과 소련: 냉전 체제의 형성
18세기 계몽주의 이후로 서양 사회는 인류가 이성의 힘으로 끝없이 진보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19세기의 급격한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겪으며 이러한 믿음은 구체적인 이념으로 발전했어요. 의회 민주주의와 법치를 강조하는 자유주의, 그리고 노동자들의 권리와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가 그것이었죠. 두 사상은 서로 반목하기도 했지만, 사회주의는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계몽주의에 뿌리를 두고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1차대전이 끝나고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베르샤유 조약을 맺어 패전국 독일에 엄청난 배상금을 물렸습니다. 전쟁의 모든 책임을 독일에 돌리고 독일이 다시 재기하기 못하게끔 한 것이었죠. 1차대전의 원인이 어느 특정한 나라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인들은 두 나라에 대한 반감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승전국의 조치에 복수하고 독일을 다시 강대국의 위치로 올려놓겠다면서 이
경기침체와 대공황, 그리고 대서양 세계의 변화
포드는 늘어난 생산력과 구매력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사회를 상상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죠. 생산성이 늘어나는 만큼 임금이 오르지는 않았거든요. 19세기 말부터 대공황 이전까지 서구 사회의 산업 생산량은 매년 5%가량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임금상승률은 1%를 조금 넘는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한 마디로, 물건을 늘어났지만 그것을 살 사람은 그만큼 늘어나지 않았어요.
포드주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사회의 개막
미국의 기업가 핸리 포드는 1차대전을 전후로 한 시점에 기업과 노동자가 맺을 수 있는 새로운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두 세력이 국가의 개입이 없어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값비싼 교통수단이었던 자동차를 처음으로 대중화시켰던 포드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기초한 사회에서는 양자가 갈등 없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어요. Photo by Mike
총력전: 1차대전과 새로운 정치경제의 등장
영미권에서는 1차 세계대전을 “The Great War”라고 부릅니다. 이전 전쟁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였고 전쟁을 수행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죠. 전쟁 초기까지만 해도 당대인들은 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할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만, 전쟁 기간 동안 목숨을 잃은 사람은 1200만여 명에 달했고, 전쟁으로 인한 기아와 질병으로 희생된 사람을 포함하면 그 수는 2500만여
제국주의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1897년 고종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조금 웃긴 일이었죠. 힘도 없는 나라가 ‘제국’이라뇨. 하지만 당대 세계인들의 인식을 고려했을 때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습니다. 19세기 말 세계의 각 지역은 제국과 식민지로 나뉘어가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국이라는 간판은 독립국임을 알리는 한 방법일 수 있었습니다. 유럽은 16세기부터 식민지를
자유의 여신을 찾아서: 이주의 역사
영화 <대부>에는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에 살던 비토 꼴리오네가 자유의 여신상을 보며 뉴욕에 입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가 1900년을 전후한 시점이었죠. 대형 증기여객선을 이용한 여행이 보편화되고 국제적인 노동시장이 형성되면서 노동력이 남는 곳에서 부족한 곳으로의 이동이 증가했습니다. 1880년부터 1914년까지 3200만 명가량이 유럽을 떠나 아메리카 등지로 이주했죠. 19세기 이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사를
농촌에서 도시로
가수 조용필의 <꿈>이라는 노래를 아시나요?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고향을 떠난 한 사람이 “춥고도 험한” 도시의 진면목을 느끼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도시화가 비교적 현재와 가까운 시기에 나타났지만, 서구 국가들에서는 19세기 중후반부터 급격한 도시화가 진전되었습니다. 농촌을 떠난 노동자들이 저마다의 ‘꿈’을 안고 도시를 찾았지만 당시의 도시는 노래의 남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