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미술의 시작과 관련해선 오랜 기간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특히 한동안은 고대 로마의 문인이자 정치인이었던 플리니우스의 낭만적인 기록이 곧잘 인용되곤 했는데요. 그는 자신의 책 <박물지>를 통해 다음과 같은 전설을 소개했습니다. 조셉 라이트, <코린토스의 소녀>, 1782-1785년경, 캔버스에 유채, 106.3x130.8cm기원전 600년 경, 고대 그리스 지역인
미술의 시작과 관련해선 오랜 기간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특히 한동안은 고대 로마의 문인이자 정치인이었던 플리니우스의 낭만적인 기록이 곧잘 인용되곤 했는데요. 그는 자신의 책 <박물지>를 통해 다음과 같은 전설을 소개했습니다. 조셉 라이트, <코린토스의 소녀>, 1782-1785년경, 캔버스에 유채, 106.3x130.8cm기원전 600년 경, 고대 그리스 지역인
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에 관한 미스테리를 다룬 영화 <러빙 빈센트>의 감독 휴 웰치멘은 자신이 이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에 관한 애니메이션(그것도 반 고흐와 똑같은 유화로 그린!)을 구상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영국 출신의 휴 웰치멘은 어느 날 런던에서 반 고흐의 전시회를 보러 갔다고 합니다. 줄은
후기 인상주의는 1880년부터 1905년까지 이어진 프랑스 미술의 경향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용어는 영국의 미술비평가인 로저 프라이가 1910년에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라는 전시회를 기획하며 처음 사용되었는데요. 이후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영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작품 세계를 열고자 한 화가들을 통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세잔, 고갱, 고흐 등을 지칭하며, 동시대
우리가 앞서 배운 인상주의 미술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과학적 발견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19세기 초 광학 및 화학 분야의 발전으로 탄생한 ‘사진’이 그 주인공이죠. 프랑스의 화학자이자 발명가인 니세포르 니에프스는 1826년 세계 최초로 사진촬영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이를 헬리오그래피라고 했는데요. 이는 태양 광선으로 그리는 그림이라는 의미였죠. 하지만 당시 기술로는 한
쿠르베의 개인전이 열린 지 8년이 지난 1863년, 사실주의의 뒤를 잇는 새로운 미술 사조가 전면에 등장합니다. 이 해는 ‘낙선자 살롱전’이 열린 해였는데요. 낙선자 살롱전이란 살롱전에 떨어진 작품을 따로 모아 대중에게 공개한 전시회였죠. 이는 역사, 신화 등 전통적인 주제의 그림만을 가치 있게 평가한 살롱전 심사 기준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일종의
1814년 나폴레옹 정권이 실각함에 따라 프랑스 제1제정이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혁명으로 쫓겨났던 부르봉 왕조가 다시 채우게 됐죠. 오랜 기간 망명 생활 끝에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루이 18세는 양원제 의회와 내각제를 규정하고, 언론, 사상, 신앙의 자유와 재산의 불가침을 규정하는 ‘1814년 헌장’을 수여하는 등 온건 정책을 펼쳤는데요. 뒤를 이은
1808년 5월 3일은 스페인인들에게 비극적인 날이었습니다. 당시 스페인은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에 침공을 당했습니다. 프랑스의 강력한 군대에 의해 스페인은 점령당했고, 나폴레옹은 스페인 국왕을 폐위한 뒤 자신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국왕으로 앉히려 했는데요. 스페인 민중은 이에 분개해 봉기했지만, 그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이날 5000여 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프랑스군에 의해
영국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윌리엄 터너와 존 컨스터블은 풍경화를 미술의 주요 장르 중 하나로 만드는데 일조한 인물입니다. 이들은 관습대로 풍경화를 그리던 이전 화가들과 달리, 자연을 깊이 관찰한 뒤에야 그림을 그렸습니다. 덕분에 두 사람 모두 근대 풍경화의 선구자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는데요. 세부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각각 차이점과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1816년 7월 2일, 세네갈로 향하던 배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메두사호. 프리깃 전함을 개조한 배로 세네갈의 생루이 항구를 차지하기 위해 항해하는 중이었죠.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해 부르봉 왕조가 복위한 상황이었는데요. 왕당파 출신의 퇴역 장성이자 메두사호의 선장 위그 뒤 쇼마리는 25년간 배를 탄 적도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자격 미달의 인물이
독일 낭만주의는 다른 나라에 비해 이른 시기에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주로 문학과 철학 분야에 한정되어 있었는데요. 이는 당시 독일 미술계가 이론적 토론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불어 아빌고르 등 당대 화가들은 원천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데생에만 천착, 회화를 포기함으로써 일반 대중과 더욱 괴리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죠. 그럼에도 독일 낭만주의 미술에
낭만주의(romanticism)이라는 용어는 중세 문학의 장르 중 하나인 기사도 소설을 가리키는 로망스(romance)에서 유래했습니다. 원래 이 단어는 ‘중세적인’ 혹은 ‘공상적인’과 같은 의미로 쓰였는데요. 18세기 초부터 그 의미가 확장되어 감성적이며 신비로운 상상을 추구하는 문학과 예술 장르를 일컫는 말로 통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프랑스 신고전주의의 대표주자인 자크 루이 다비드는 폼페이 유적 발굴이 시작된 1748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20대 시절인 1776년 로마 상 장학금을 받아 이탈리아로 유학을 다녀왔는데요. 그곳에서 수많은 고전 미술과 당시 유행하던 그리스 복고주의 미술품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이를 두고 “마치 백내장 수술을 받은 것 같았다”고 회상합니다. 흐릿하게 보이던 눈이 마치 맑게
1592년 이탈리아,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오래된 건물과 회화 작품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인해 용암과 화산재에 파묻혀 있던 그리스 로마의 도시, 폼페이가 발견된 순간이었죠. 우연한 계기로 폼페이의 소재가 밝혀졌지만 당시는 본격적인 발굴이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생생하게 보존된 고대 도시를 눈 앞에 두고 나중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죠. 잠시 잊혀졌던